신명기 2
헌법은 어려운 한자어로 쓰여 읽기 어렵다. 때때로 전공자마저 고개를 흔들 정도로 골치 아프게 만든다. 헌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면, 주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헌법 전문에 의하면 주어는 ‘우리 대한국민’이다. 그러면 대한민국 헌법을 들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헌법 69조에 헌법을 들어야 할 사람을 명시하였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취임식 선서를 한다.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 헌법의 청자(聽者)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므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한다.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은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
듣는 대상을 넣어서 헌법 1조를 다시 읽어보자.
“우리 대한국민은 대통령에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대통령에게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을 들어야 할 사람은 대통령뿐만 아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도 들어야 한다. 국민은 자신이 어떤 권한을 권력자에게 위임했는지 알아야 한다. 헌법의 정신과 뜻을 바로 새기지 못하면, 권력자는 자기 멋대로 권한을 남용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들어야 할 대상은 또 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이 헌법을 듣는다고 상상해보라! 왕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역적이라 하여 삼족을 멸하던 그 시대 양반들이 이 헌법을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깜짝 놀라 나라 망하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라를 망하게 한 자들은 바로 그들이다. 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제멋대로 행하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그때 독립운동 하던 선배들은 생각하였다. '이제 새롭게 나라를 세울 때는 두 번 다시 왕에게, 독재자에게 권한을 다 넘겨주지 않겠다. 대통령을 세우기도 하고 내리기도 할 권한은 우리 대한국민에게 있다.'
30살 안중근 의사는 조응순 선생 등 항일투사 12명과 함께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쓰며 비밀 결사대를 만들었다. 그가 세우려 했던 나라는 결코 조선왕조가 아니었다. 아직 나라도 없던 시절이지만 그들은 '대한민국'이라고 나라 이름을 정하였다. 대한국인이 주인되는 나라 대한민국이다. 안중근 의사는 지장을 찍을 때마다 손바닥 도장 옆에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 썼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피 흘려 싸우다 죽어간 끝에 드디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그들의 눈물, 헌신, 피, 희생으로 이 나라가 세워졌다. 헌법은 바로 그분들에게 바치는 헌정사이다. 결코, 그 뜻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신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이다. 신명기에서 말하는 자는 모세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시다. 신명기 율법을 들어야 할자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5:1, 6:3,4, 9:1, 20:3, 27:9)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도 이사야도 동일하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는 언약의 주님 앞에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실천을 전제한다. 믿음은 어떤 대상을 살펴보고 깨닫는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자신을 말하는 분의 뜻에 맡기겠다는 순종적 표시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는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신학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규명하는 신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탐구하여 결론짓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머리 숙여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 없는 신학, 시대를 읽어내지 못하는 신학은 말 잔치나 말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실천적인 헤브라이즘과 달리 헬레니즘은 이데아의 세계, 관념의 세계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이 실천적이기보다 이론적이기 때문에 다른 학문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그들은 관념의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식물학자가 영원한 진리(관념의 나무)를 탐구하지 않고 불완전한 복제물(실제 나무들)을 연구하기 때문에 저급하다고 하였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초기 기독교 안에 급속히 유입하였다. 1세기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필론의 영향으로 기독교 안에 신플라톤주의가 들어와 영성(하늘의 지혜)을 강조하였다. 영성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은 현실의 세계를 무시하였고, 실천과 삶과 행함의 가치보다는 관상과 명상을 통하여 영적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보다 깨닫는데 더 역점을 두었다.
레벤슨(John D. Levenson)은 “헬라인은 눈으로 생각했지만, 히브리인은 귀로 생각하였다.”는 속담이 일리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구약 성경에는 시각적 묘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우리는 아브라함의 머리 색깔이나 모세의 키는 알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삼상16:7) 심지어 성경에서 “보라”는 말을 할 때도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보고 그런 행위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요구이다.
마이클 호튼은 그의 책에서 이것을 “내가 여기 있나이다”와 “알겠다”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는 자신을 주님의 뜻에 맡기며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겠다는 뜻이지만, “알겠다”는 깨닫고 이해하는 주체는 나이고 내가 그 지식의 소유자다. 거기에는 순종의 의미가 크지 않다. 지적 통찰은 기껏해야 나는 성경을 이렇게 본다는 개인 의견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말싸움하면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 모두 자기 이론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고 따르는 일이다.
신명기는 반복하여 말한다.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신5:1)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신6:3)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신10:12)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신27:9)
율법을 이론으로 공부하면 머리 아프다. 반대로 율법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과 연관 지어 해석하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모색한다면, 그보다 유용한 일은 없다. 율법뿐만 아니라 구약의 말씀은 모두 실천적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실천하라고 신명기는 요구한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스티븐 웹은 종교개혁이 '말씀을 다시 음성화하는 사건'이라고 하였다. 책상 위에 지식, 머릿속의 이론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신학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규정하지만, 신학의 궁극적 목적은 믿는 바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단순히 조직 신학적인 지식의 변화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삶의 전 부분,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모든 부분의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종교개혁은 말씀에 의지하여 인간의 삶 전부를 변화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이라기보다는 혁명이라고 함이 더 옳을 듯하다.
오늘날 대한민국 기독교가 이론 싸움만 일삼고 실천은 게을리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법과 정의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법 이론만 가지고 싸우는 현 법조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이다. 스티븐 웹의 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문화시키지 말고 다시 음성화하여 우리 귀에 엄중하게 들려주어야 한다. 칼빈은 말하였다.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이 친히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귀에 들려주는 말씀이다. 그 말씀 앞에서 아담과 하와처럼 숨을 것인지, 아니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몫이다.
수천 년 전 쓰여진 신명기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엄중히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는 이 말씀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여 지켜라!”
이것이 바로 신명기의 중심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