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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19. 2018

기독교는 변해야 한다.

프랑스의 르네 르누아르(René Lenoir, 1927~2017)가 쓴 '배척받은 자들'(1974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캐나다 인디언 아이들에게 문제를 주고 제일 먼저 답하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아이들은 모두 함께 의논하고서 똑같이 답을 외친다. 캐나다 인디언들은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다. 상을 받으면 모두 같이 받아야 하고, 아픔이 있으면 모두 같이 아파해야 한다.


아이들이 필리핀에서 공부할 때다. 옆집에 미술 선생이 살았는데 학생들 작품전시회에 초청하였다. 학교 이곳저곳에 작품이 전시되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최우수상이나 우수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물었다.

“어떤 작품이 최고예요?”

“모든 작품이 최고입니다.”

“아이들의 작품 하나하나는 그들이 최선을 다한 것이기에 등수를 매기지 않습니다.”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한국은 경쟁 사회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기는 법을 배운다. 학교는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세운다. 달리기를 하여도 선착순이고, 손을 제일 먼저 든 학생에게 답할 기회가 주어진다. 자녀가 학급에서 일 등을 하면 부모는 기뻐한다. 올림픽을 해도 금메달 딴 선수에게만 관심이 쏠리고 혜택도 준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새겨진다.


능력있는 사람만 인정받고 대우받는 서울 생활은 각박하기 짝이 없다. 시골은 그래도 아직 정이 남아 있다. 요즘 시골도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공동체와 동료의식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로마시대 변방 중에 변방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핍박을 피해 가정이나 카타콤에서 비밀스럽게 모였다. 카타콤은 원래 지하 무덤이다. 지하 세계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요, 빛도 없는 어둠의 세계다. 벽은 관 모양으로 움푹 파서 하나에서 네 구의 시체를 안치하였다. 로마의 카타콤에 안치된 시신의 수는 줄잡아 175만에서 400만에 이른다.


기독교인이 카타콤에 숨어들어 간 이유는 핍박을 피해서였다. 그들은 건물이나 조직 형태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 체포되어 죽을지 몰랐기에 마치 독립운동가들이 점조직으로 움직이듯 그렇게 모였고 흩어졌다. 중요한 것은 교회라는 형태가 아니라 진리였다. 목숨걸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진리였다. 그들이 복음에 헌신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가처럼 힘 있는 세력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프랭카드를 내걸 생각도 하지 않았고, 불신자를 반대하는 집회를 계획하지도 않았다. 적은 수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고 힘썼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소그룹으로 모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낯선 이를 환대하였다. 언어가 다르고, 계급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문제 삼지 않았다. 오직 믿음만 중요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 있는 사람만 골라서 환대하지 않았다. 세상 누구라도 예수 이름으로 환대하였고,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확신하였다. 설령 환대가 바뀌어 적대가 되고, 핍박으로 돌아와도 기쁨으로 순교하였다. 원수에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명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


초대 교인의 수는 적었지만 역동적이었다. 세상을 흔들었다. 기독교인을 접한 사람은 누구라도 그들이 가진 삶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이런 식의 삶이 가능할까?' 불신자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았다. 그리고 진리 앞에 무릎 꿇기 시작했다. 진리는 혁명적이다. 세상 나라를 뒤엎어버리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가치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람을 많이 끌어모아 큰 교회 만들어 보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좋은 프로그램과 화려하고 장엄한 예배의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신 세계 속으로 빛처럼 소금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갔다. 그들 속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영향력을 끼쳤다.


그들은 결코 세상을 적대시하지도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다. 자신은 거룩하고 세상은 속되다 하지 않았고 교회는 성스럽고, 그들은 죄있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같은 이분법적 구호는 생각지도 않았다. 오히려 세상 사람에게 다가가 '나도 당신과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고민에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힘을 썼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보다 복음의 삶을 살았다.


교회는 결코 순위를 매기거나, 계급을 나누지 않았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을 계층적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같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목사)이었다.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들은 세상으로 파송되어 나가는 선교사였다. 그들은 복음대로 살다가 죽을 각오로 신앙생활 하였다.


초대교회는 한 마디로 변두리 종교였다. 그들은 비록 땅속 지하무덤에서 살지만, 그들의 영적 영향력은 세상 중심을 흔들었다. 그들은 기꺼이 낮아지고 내려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시고 세우셨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러하였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기독교는 이제 숨을 필요도 없고, 지하 무덤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변두리 종교였던 기독교는 순식간에 로마 도심 한가운데 자리하게 되었다. 핍박받던 자리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리로 옮겼다. 기독교회는 그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도시가 갖는 특유의 풍습에 취하였다. 능력있는 사람이 대우받고, 경쟁에서 이겨야 인정받는 도시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였다. 교회는 공동체의 강점을 버리고 개인주의가 판치는 세상을 닮아갔다. 누가 더 큰 교회를 세우느냐? 어느 교회 교인이 숫자가 더 많은가? 이제는 각개 약진이었다.


교회는 복음보다, 진리보다 건물에 관심이 있었고, 조직에 관심이 있었고, 종교 예식과 계급에 관심이 있었다. 진리를 따라 살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소망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 권세와 함께 쉬운 길을 선택하였다. 교회와 세상과 손 잡고 권세를 휘둘렀고,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교회는 세상에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진리가 세상 권세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어떤 교파는 세속의 왕을 교회의 머리로 세웠다.


세상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왔다. 승자와 패자를 뚜렷하게 구분하듯이, 교회도 뚜렷한 계층으로 구분하였다. 사제와 평신도, 거룩과 속된 것으로 구분하였다. 평신도 사이에도 계급이 생겼다. 힘 있는 위원회에 들어가서 발언권을 행사하려면, 장로나 권사쯤은 되어야 했다. 교인들은 종교생활에 헌신하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 헌신하지 않는다.


진리를 따라 우직하게 사는 삶은 인기가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효율성이 중요하다.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노력하였고, 예배당 분위기, 안락한 좌석, 화려한 성가대, 교회 건물의 편리함 등,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온갖 장치를 마련하였다. 마치 백화점에서 다양한 상품을 갖추어 놓고 소비자를 유혹하듯이 교회는 소비주의에 빠져들었다.


변방에 머물던 초대교회가 죽기 위해서 믿었다면, 도시로 들어간 교회는 살기 위해서, 축복받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  믿었다. 누가 나가서 '나는 예수 믿고 축복받고 잘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일등 되었습니다.' 간증하면, 꼴찌들은 손뼉을 치면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멋진 간증할 수 있기를 꿈꾸었다. 교회는 점점 세속화의 길을 걸어갔다. 기독교의 진리는 껍데기만 남아 바리새적이 되었고, 복음은 사라지고 종교만 남았다.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하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불행한 것은 초대교회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변두리의 작은 개척교회들도 도심 한 복판에 들어가 성공하기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언제 성공할까? 언제 큰 교회를 이룰 수 있을까? 이제는 작은 교회가 깨어야 한다. 더는 로마 도성이 가지는 사고 방식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변두리로 물러나 있는 작은 교회가 진리에 깨어있고, 복음의 삶에 헌신해야, 한국 기독교에 소망이 있다.


참고도서.

1.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새로운 교회가 온다', 지성근 옮김, (IVP : 서울) 2009년

2. 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찬성 옮김, (성바오르 : 서울) 2015년

3. 김석철, '세계 건축 기행', (창작과 비평사 : 서울) 1997년

4. 원용국, '성서고고학 신약편' (지혜문화사 : 서울)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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