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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25. 2018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참석한 윤치호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선교대회가 열렸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조선인 대표로 윤치호가 참여하였다. 그는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선교에 관련된 주제를 발표하였다.


윤치호는 조선인으로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 무관으로서 아들 윤치호가 성공하기 위해서 신식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1881년 일본의 신식문화를 배우고자 신사유람단이 갈 때 17살 윤치호도 함께 갔다. 그는 일본 동인사라는 중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조선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 되었다. 그는 개화파였던 김옥균, 서광범과 교류하였고, 김옥균의 권고에 따라 4개월간 영어를 배웠다.


4개월간 배운 실력이 뛰어날 리 없지만, 당시 조선에는 윤치호만큼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는 19살 나이에 초대 주한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의 통역으로 발탁되어 귀국하였다. 이제 성공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불행하게도 1년 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개화파에 속한 윤치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기독교를 접하였다. 그는 알렌(Young J. Allen) 선교사가 세운 중서서원(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알렌 선교사의 삶과 인격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그는 알렌을 아버지처럼 여겼으며 세례를 받고 조선 최초의 남침례교 교인이 되었다. 3년 6개월간 중서서원에서 공부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다시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성적은 언제나 수석이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신학생이었다. 그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쓴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내게는 실천해야 할 선교가 있다. 내 생은 이 의무에 어느 만큼 충실하게 부응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라질 것이다. 선교란 내 겨레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교육하는 일이다.” 밴더빌트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에모리대학에서 2년 동안 인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YMCA 활동도 열심이었다. 그는 에모리대학 시절 조지아주 대표로 YMCA 대회에 나가 강연을 했다. 강연은 조선인을 미국인과 똑같이 봐 달라는 것과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유학 시절 인종차별 경험을 많이 하였다. 가난한 조선인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던 미국 여성과 자신을 거지로 여겨 1달러를 주려 했던 미국 목사, ‘너 오늘 네 동포인 중국 하층민에게. 가느냐?” 조롱했던 백인 동급생, 자신을 일부러 넘어뜨려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백인 불량배 등을 만나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는 유학시절 선교의 소명도 받았지만, 동시에 힘없고 가난한 조선인으로 서러움을 겪으며 힘의 논리에 빠져들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세계를 실제로 지배하는 원리는 정의가 아니고 힘이다. 힘은 곧 이 세계의 신이다.” 그는 힘 있는 나라를 부러워하였고, 힘없는 나라는 무시하였다. 그는 중국, 조선, 미국, 일본을 힘의 논리로 이해하였다. 중국은 악취 풍기는 불결한 국가로 낙후하고 무력하면서도 완고하고 오만한 국가다. 조선은 그런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의지하는 수치스러운 국가다. 조선은 마치 눈멀고 귀먹고 어리석은 노인(중국)의 고함소리에 놀라는 소년과 같다. 반대로 미국은 당대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로 최선의 정치제도인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국가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모델이 되는 나라는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환경과 인민이 청결한 국가, 힘차게 발전하는 동양의 문명국가로 동양의 낙원이요 세계의 정원이다. 조선은 기독교화 다음으로 일본화가 된다면, 조선 최대 축복이 될 거라고 일기에 썼다. 숭실대 유응렬 교수는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에서 윤치호가 나중에 친일하게 된 원인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하였다.


1907년 에딘버러 선교대회를 기획하기 위하여 전 세계를 여행했던 존 모트가 조선을 방문하였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데 윤치호는 그의 통역을 맡아 그와 교제하였다. 존 모트는 조선 교회의 영적 부흥을 보고 도움이 되려고 조선 총독부와 고종을 만났다. 1) 이것을 계기로 존 모트는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윤치호를 초청하였다. 에딘버러 선교대회에 초청받은 사람은 조선 선교사 15명과 조선 그리스도인 18명이었으나 조선인으로 윤치호만 참석하였다. 그는 두 번의 발제를 하였다.


첫번 발제는 “모든 비기독교 세계에 복음 전하기”라는 주제였다. 그는 조선을 세계 선교의 축소판으로 보았다. 그는 조선을 통하여 세계 기독교를 보았다. 25년 전 단 한 명의 선교사도 기독교인도 없었지만, 1910년에 이르러 20만 명으로 부흥하였다. 조선 기독교는 일본과 달리 민중에서 시작한 선교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선교는 하향(top-down) 방식이 아니라 상향(bottom-up) 방식 선교였다.


그는 조선 기독교의 세 가지 위험을 언급하였다. 첫째 일본 침략과 함께 일본 불교가 급속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둘째 서양 철학 사상의 유입이다. 셋째 갑작스럽게 성장하는 조선 기독교다.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도 없이 갑자기 성장하는 기독교는 나중에 근본정신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교회성장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시스템과 체계적인 교육이 없는 성장은 독이 될 수 있다.  그는 조선에 더 많은 서양 선교사의 파송이 시급함을 역설하였다. 그가 염려한 대로 한국 기독교는 1960년대 이후 교육받을 기회도 없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기복신앙과 성공주의, 물질주의에 함몰하면서 부패의 길을 걷고 있다.


두번째 발제는 미국 남 감리교를 대표하여 ‘선교현장의 교회’라는 제목이었다. 선교를 위하여 들어오는 외국 선교부의 돈을 선교사가 주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더 높은 원리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원리다. 모든 돈은 선교부의 것 이전에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선교비 분배는 지역 교회의 마음에 어떤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디에서 모금하였던 돈은 투명하게 사용하여야 하고, 지역교회 발전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여야 한다. 선교사들은 신실한 토착 교회 지도자와 협력하여 사역해야 한다.  그가 지적한 투명한 재정 운영은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숙제다. 교회 문제 대부분은 돈사용에 있는데 이 문제는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조선 선교사를 대표해서 장로교의 마포삼열 선교사와 감리교의 조지 존스 선교사가 발표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조선 교회 성장 비결에 대하여 발표하였고, 조지 존스 선교사는 조선의 교육 실태를 발표하며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하며 여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에딘버러 선교대회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다. 모진 고문과  3년 동안 감옥생활은 윤치호를 바꾸었다. 그는 일본의 강력한 힘을 절감하였고, 조선은 100년이 지나도 독립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엄혹한 정치 현실 앞에 그는 굴복하였다. 그는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보다 세상 권력의 힘이 더 크다고 보았다. 패배주의에 빠진 그리스도인은 비굴할 수밖에 없다. 그는 3.1 만세 운동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참가를 거부하였다. 그는 중일전쟁(1937)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 행보를 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 활동하였다. 태평양전쟁(1941) 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고문으로 활동하며 징병제 시행을 환영하고 학도병을 권유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직전 일본은 조선인 7명을 일본 귀족으로 선발하였는데 윤치호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본의 억압 아래서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아마도 그것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일본과 미국의 싸움 속에 에딘버러 대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에딘버러 대회에서 찬송시간이 너무 길었다느니, 인종차별이 거기에도 있다느니 하면서 비아냥거렸다. 그것이 그의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추한 노인으로 바뀌었다.


기독교는 대체로 윤치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선교사관을 대표하는 백낙준은 윤치호를 '기독교 선교의 영웅'과 '일제 박해의 순교자'로 평가하였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윤치호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극찬하였다. 민족사관을 대표하는 민경배 역시 윤치호를 외세의 억압 속에 민족과 고통을 함께하며 구원의 의미를 읽으려 한 '역사 신학자'로 '위대한 목회자'로 그린다.  ‘토박이 사관’을 지향한 전택부는 윤치호를 평신도 한국 토박이로서 선교의 문을 열었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반면 윤치호의 친일행적을 살펴보면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도 있다. 러시아인으로 한국에 귀화한 후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한국학부 교수로 있는 박노자는 윤치호를 인종차별적 생각을 하고 힘의 논리에 굴복한 허약한 기독교인으로 묘사하였다. 윤치호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숭실대 유영렬 교수는 윤치호의 후반기 친일 행적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 그의 초기사상에서 그러한 조짐이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윤치호에게 적절한 말씀이다. 그는 조선 민중을 생각하였고, 그들의 계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러나 세속의 논리와 힘의 논리에 함몰된 유약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세상 권력 앞에 머리 숙이고 굴종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나는 윤치호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름다울까?’ 고민한다. 솔직히 말하면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못했던 윤치호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1) 모트는 1913년 두번째 방문하였다. 그 때 일본의 억압으로 한국교회는 심각하게 퇴보하였고,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혀 있었다. 당시 YMCA 총무 이승만은 미국에서 기금조성에 힘쓰고 있었고,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다. 모트는 "기독교 선교의 적정기”(1910)라는 책에서 한국교회를 4가지(성경공부하는 기독교인,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베푸는 그리스도인, 자립하는 선교)로 소개하며 모든 비기독교 국가에 좋은 모범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방문했을 때 조선은 더이상 모범적 국가가 아니었다.


참고도서

1) 안신, ‘윤치호의 종교사상 연구 - 종교학적 방법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2007년,

2) 안신, ‘윤치호의 선교사상과 에딘버러선교대회’ 선교신학 24집 상권, 2010년

3) 김은수,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한국교회의 기여와 과제’ 선교신학 39집 2015년

4)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1910’ (연세대학교출판부 : 서울) 1985년

5)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 서울) 1985년

6) 류대영,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서울) 2007년

7)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전망사 : 서울) 1993년

8)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01’ (한겨례출판 : 서울)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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