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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30. 2018

우리는 하나다.

집단인격

대학 시절 CCC 원단 금식 기도회에 참여하였다. 삼일 동안 금식하면서 집회 하는데 배고파 죽을 것 같았다. 많은 강사가 말씀을 전하였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먹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결론 내렸다. 기도를 하려면, 잘 먹으면서 해야지 굶으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원단 금식 기도회에 유일하게 얻은 유익이 있다면, 대천덕 신부의 강론이었다. 대천덕 신부가 젊은 대학생 앞에서 머리 숙여 회개하는 모습을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복음을 전하려고 조선을 찾아온 많은 선교사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가 예수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가 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조선을 생각하기보다 미국을 생각하여 일본 편에 섰던 사람도 있었다. 


대천덕 신부는 1918년 중국 산동성 미 장로교 선교사 루번 아처 토리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조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선교에 대한 의견 차이로 장로교에서 성공회로 교파를 옮겼고, 1957년부터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대천덕 신부는 조선 시대 선교사의 잘못과 직접 관련은 없다. 그런데도 대천덕 신부는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과거 선교사의 잘못을 곧 자기 잘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진심으로 고개 숙였다. 나는 그가 우리 앞에서 선교사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이후 대천덕 신부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평생 간직하고 있다.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 중에 신약 성경 이외에 1세기 지중해 연안의 문헌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잘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경이 마치 오늘 이 시대 사람을 위하여 쓴 것처럼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성경은 최초의 독자를 위하여 쓰였다. 그 시대의 문화, 상황,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오해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오해가 ‘개인주의’(individualism)다. 현대는 개인주의가 범람하여서 개인의 인권, 가치, 취향, 생각,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1세기 팔레스틴을 비롯해 지중해 세계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개인에 대한 개념이나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 집단에 속한 존재로 생각했지, 개인적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일 지역 이름과 가족 이름으로 이름을 짓는다고 생각해보라. 나사렛의 요한, 베들레헴의 보아스, 가나의 마리아. 당시 대부분 이름은 그런 식이었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이름지었다.


영어 성경에 ‘you’는 단수로 해석할 수 있고, 복수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는 you를 별 생각 없이 단수로 이해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you는 복수다. 우리 말 성경에 ‘너희’라는 단어를 구약에 2,229회, 신약에 1,665회 사용했는데 명백히 복수다. 성경을 읽다 보면, 가족, 마을 또는 도시를 하나의 인격체로 취급해서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딛1:12)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23:37, 눅13:34)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막14:70)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마11:21-24,눅10:13-15)

브루스 말리나(Bruce J. Malina, 1933-2017)는 1세기 사람의 이러한 특성을 상호관계주의(dyadism)라고 하였다. 어느 집단에 속한 사람은 그 집단의 가치와 세계관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그에 걸맞게 살았다. 그러니까 이름만 들어도 어디 출신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가정 공동체를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개인을 부르시는 것 같지만, 언제나 공동체로 부르셨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는데, 아브라함의 가족과 수백 명의 종까지 모두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만이 아니라 어떤 성읍과 지역 전체에 전달되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해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위로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40:1) 하나님은 개인의 총화로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말씀 앞에 반응하기를 요구하였다. 개인의 회개와 믿음은 백성에게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는 전체 속하며, 굳이 하나가 드러난다면 그는 전체를 대표하는 자이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집단인격’(Kollektivperson)이란 말로 이를 설명한다. 한 사람은 집단 전체의 인격을 대표하고 드러내는 자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한 집단인격을 이루며, 아담의 범죄는 곧 인류 집단의 범죄와 같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할 당시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는 원리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 한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이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막10:4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4)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딤전2:6)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벌을 받으셨고 우리를 살리셨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하였다. 성경의 교훈은 교회 공동체를 향한 것이 대부분이지, 한 개인을 향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다.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고, 사회 관계고, 집단인격이다.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백성이다.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다. 이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같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는 모이든지 흩어지든지 그리스도의 몸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배당에 모일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며 교제하므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반대로 흩어질 때는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생각을 하고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모습과 경건한 모습은 세상과 분리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모일 때 나타나지 않고 흩어질 때 나타난다. 


인간의 인격성은 곧 사회성을 뜻한다. 사람을 대하는 모습과 자세를 통하여 그 사람의 인격이 온전히 드러난다. 개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공동체도 ‘집단인격’을 가지고 있다. 교회 공동체로서 집단인격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빛 된 모습을 드러낼 때 나타난다. 그는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대표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희생하고, 사랑하고, 겸손하고, 죽으신 것처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에 나간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병폐요 모순은 개인주의 신앙이다. 나 혼자 예수 잘 믿고 축복받고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신앙이 가장 큰 문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문제를 먼 산 불구경하듯 하며, 남의 문제로 여긴다. 나와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서인지 욕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심지어 조롱하기도 한다. 교회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기고 회개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한국 교회는 지도자 위치에 있는 목사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집단인격’을 가지지 않은 것 같다. ‘나 하나쯤이야’, ‘나는 안 그래’, ‘나만 아니면 되지.’ ‘왜들 저 모양이야’ 모두 개인주의 생각에 사로잡혀 남 탓만 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사실을 잊고 있으면, 병들고 망가지고 결국 죽음밖에 없다. 지금 한국 교회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구렁텅이에 빠지는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참고도서 

1.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교제' 유석성, 이신건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 서울) 2013년

2. 브루스 J. 말리나, '신약의 세계', 심상법 옮김, (솔로몬 : 서울) 2000년

3. J. 몰트만, '본훼퍼의 사회윤리', (대한기독교서회 : 서울), 1987년

4. 한국선교신학회 엮음, '선교적 교회론과 한국교회'   (대한기독교서회 : 서울),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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