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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27. 2018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

한국 교회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명성교회 세습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건 교회를 개인 소유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를 개인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목사뿐만 아니다. 평신도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잘못된 교회론은 전적으로 목사의 책임이다. 교회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나아가 사유화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개인 소유물로 바꾸어버렸다. 한국 교회 세습 문제는 세습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근본적으로 교회론이 잘못된 결과다. 이것은 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에 걸친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교회성장학’은 강력한 거부와 불신이 있다. 전도하자 하면 목사 교회니 목사나 성장을 위해 열심히 뛰라고 말하는 평신도가 제법 있다. 평신도의 외면 속에 현재 한국 교회는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


쇠퇴의 길을 갈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생각이 있다. 부정과 부패가 한국 교회의 문제라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방향을 전환하자는 생각이다. 그것은 곧 사회 정의와 건전한 사회 운동을 통해서 부패한 기독교의 이미지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이미지 메이킹을 하자는 생각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 지배를 받던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각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억눌렀던 서구 사상, 특별히 기독교를 배척하고 토착 종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제 3세계가 생각하는 기독교는 식민지의 앞잪이요, 식민지배 이론을 만들어 식민지 백성의 정신을 갉아먹는 종교였다.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반발은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인도는 특별히 더 강력하였다. ‘서양 선교사는 물러가라!’ 여기저기 함성이 터져나왔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반성으로 서구 교회는 사회 정의와 사회 운동으로 기독교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선교 단체는 직접적인 전도보다 간접적인 접근 방식을 선택하였다. 전부터 해 오던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더욱 열심히 자선사업, 학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 제 3세계 복지를 위하여 뛰었다. 그들은 이것을 파종 신학(a theology of seed sowing)이라 하였다. 열심히 씨를 뿌리면 언젠가 기독교에 대하여 생각을 바꾸고 반드시 열매 맺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선교단체의 기대와 달리 결과는 형편없었다. 인도인의 마음을 돌리기에 너무 늦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맥가브란(Donald McGavran, 1897~1990)이다. 그는 3대째 인도에서 선교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3살 나이에 아버지 (John McGavran)를 따라 에딘버러 선교대회(1910)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는 22살 버틀러 대학 시절 선교에 헌신을 다짐하였다. 그는 기도하였다. “주님, 제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보내시는 곳은 어디든 가겠습니다. 제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을 따라 행하겠습니다.”  


그는 26살 때 ‘연합 기독교 선교회 파송’으로 아버지의 선교지인 인도로 갔다. 첫 사역은 하르다의 기독교 학교 교육감이었다. 그는 교육자로, 연구원으로, 현장 책임자로, 교회 개척가로 일하였다.


예일대학을 졸업한 그는 보수 신앙을 가진 아버지와 달리 자유주의자였다. 1930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온 그는 자유주의의 본산인 뉴욕 유니온 신학교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그가 보수주의로 돌아선 것은 1932년 인도로 다시 돌아가 전임자(William McDougall)가 이끌던 성경공부반을 이끌 때였다. 주일날 아침 15~20명의 남성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였다. 그는 질문하였다. “오늘 성경 본문을 읽으며 가진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게 무엇일까?' 입니다”였다. 충격이었다. 그때 자유주의 신학은 결코 진리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 없이 복음 전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선교 이론의 첫 번째 원리가 성경의 권위다.


둘째로 그는 성장하는 교회와 쇠퇴하는 교회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신학이 무언가도 연구하였다. 그는 인도 중부 145개 교회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134개 교회는 정체하거나 줄어든 반면, 11개 교회는 매년 20퍼센트 성장하였다. 무엇 때문일까? 그가 찾은 결론은 이러하다. 전통적 서양 전도 방법인 일대일 전도를 하는 곳과, 공동체가 집단으로 회심하는 곳의 차이였다. 인도는 카스트제도라는 특수한 사회적 상황이 있다. 어느 한 사람이 회심하면 그는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고, 계급도 한 단계 떨어진다. 그는 공동체를 잃어버리고 외톨이가 되어 신앙을 유지하기 매우 힘들어진다. 그러나 집단의 우두머리가 회심한 후 집단 전체가 따라 회심하면, 따돌림이나 계급이 추락하는 일은 없어진다. 그 집단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여기서 ‘동질집단 원리’를 발견하였다.


셋째로 그의 교회성장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인류학(anthropology)과 사회 통계학이다. 후일 그가 풀러 선교대학원 초대 학장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초빙한 교수는 인류학자인 알란 티펫(Alan Tippett)이었다. 공동체 전체의 회심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로 사회 통계학적인 방법과 문화인류학적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라는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동질집단 원리’를 개발하였다. 그는 이미 기독교가 널리 퍼진 현대 국가의 지역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선교지, 특별히 인도 같이 공동체가 강하게 작동하는 곳에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동질집단 원리’를 만들었다.


맥가브런의 주장이 비판받는 요점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그의 보수 신학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몸 담고 있으면서 그것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더욱 강경한 보수신학으로 돌아섰다. 그는 사회 정의와 사회 운동을 선교 정책으로 삼는 자유주의 신학은 열매 맺을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연구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 이미지가 좋아진다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오지 않는다. 복음의 씨를 뿌리자는 파종신학과 달리 맥가브런은 복음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는 추수신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맥가브런은 선교를 좁게 해석하였다. 교회개척, 전도, 교회성장만이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는 통전적 선교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1983년 아더 글라서와 작업하면서 자신의 선교개념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말로 하는 복음 전도만 고집하던 이전 태도를 버리고, 교육, 문맹 퇴치 프로그램, 농업, 의료, 현존, 대화, 선포, 사회 행동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도 선교로 보았다. 그러나 그런 사회 행동이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할 때만 선교라고 해석하였다.


둘째로 맥가브런은 철저히 교회 중심적 선교를 주장하였다. 선교의 목표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선교학을 “교회성장학”이라 이름하였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 성장학'은 선교현장에서 세워진 이론이다. 


그의 제자 피터 와그너는 교회성장학을 '선교현장'에서 '미국 교회 현장'으로 끌고 왔다. 피터 와그너는 “당신의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1976)는 책을 출간하면서 미국 교회에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교회성장학은 선교신학이 아니라 지역 교회를 성장하는 방법론으로 변하였다. 물론 피터 와그너의 교회 성장학에 맥가브란이 동의한 점도 있다. 때마침 오순절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자 존 윔버를 필두로 교회성장학은 성령론을 전향적으로 수용하였다. ‘영적대결’, ‘제3의 물결’, ‘영적은사는 당신의 교회를 성장하게 할 수 있다’  등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케팅 전문회사인 바나 리서치 그룹의 회장 조지 바나가 교회성장 이론에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마케팅 기법이 뛰어난 교회가 더 성장한다’라는 책을 썼다. 특정한 선교 필드에서 발견한 선교이론인 ‘교회성장학’은 이제 미국의 실용주의 마케팅 기법으로 변질하였고, 점차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셋째로 맥가브란의 선교신학이 비판받는 이유는 어찌 보면 지엽적이다. 성경 해석에 문제가 있다느니 혹은 사회 통계학이나 문화 인류학을 도입했다느니 하는 비판은 중요하지 않다. 헨드리쿠스 바빙크가 성경적 측면에서 반박하였지만, 그의 반박이 독일 선교사들이 시행했던 국가단위 집단 개종에 해당하지 맥가브런에게는 별로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 해석은 학자마다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맥가브런의 선교이론에서 얻은 유익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가 쇠퇴하고 사회복음이 점점 부상하는 국면에서 ‘과연 선교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 고민은 현재 한국교회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맥가브런이 선교를 고민하였듯이 한국교회는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두번째로 그는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교회들이 왜 성장하고 쇠퇴하는지 현장을 연구하면서 성경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역사적, 행동 연구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선교학은 성경 하나에만 의존할 수 없는 매우 폭넓은 학문이다. 선교 대상인 사회를 이해하려고 했던 그의 노력과 시도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선교는 단순히 해외 선교를 말하지 않는다. 교회는 선교를 위하여 세움받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선교에 대한 고민은 곧 교회에 대한 고민이다. 


참고도서

1) 구병옥, ‘교회성장학의 아버지 도날드 맥가브란’ 개신논집 17, 2017년,

2) 최동규, ‘다시 생각해보는 도널드 맥가브란의 선교사상’ 선교신학 35집, 2014년

3) 이후천, ‘교회성장운동의 신학’ 선교신학 7집 2003년

4) 홍기영, ‘교회성장운동의 역사’ 선교신학 7집, 2003년

5) 전호진, ‘선교학’ (개혁주의신행협회 : 경기) 1987년.

6) J.H. 바빙크, 선교학개론, 전호진 옮김 (성광문화사 : 서울) 1980년

7) 조지 바나 ‘마케팅이 뛰어난 교회가 더 성장한다.’ 김광점 옮김 (베다니 출판사 : 서울)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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