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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02. 2018

평신도여 일어나라!

나의 아버지는 19살 때 예수를 영접하였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평양시로 편입되었지만, 그때는 평양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중화라는 마을이 아버지 고향이다. 중화에는 기억자 모양의 건물로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드리는 전통적 예배당이 있었다. 목사님은 성찬식이나 세례식을 할 때만 와서 집례하였다. 한 달에 한 번 조사(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도사)가 와서 말씀을 전하였다. 나머지 주일은 평신도가 돌아가며 설교하였다. 아버지는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설교를 하게 되었다. 조사에게 설교를 써달라고 부탁하여 달달 외워서 한 설교이니 본인의 설교라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19살 청년이 설교한다는 것은 요즘 교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초대 교회에는 목사, 장로, 권사 같은 직분이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집사 직분이 처음 생겨났지만, 현대 교회의 집사와는 달랐다. 현대 교회처럼 제도와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초대교회 집사는 하나의 기능직이었다. 그들은 고아와 과부를 돌볼 뿐 아니라 복음 증거자로, 설교자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스데반 집사는 위대한 설교자였고, 빌립 집사는 위대한 선교사였다. 빌립 집사는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목사도 없거니와, 사도들이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의 5가지 기능직을 소개하였다.

“그가(주께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주께서 다섯 가지 직분을 주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을 따로 구별하여 세워서 주신 직분이 아니다. 호주의 선교학자인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바울이 말한 다섯 가지 직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를 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인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신 직분이다. 이 직분은 상하관계를 나타내지 않으며 철저히 기능적이다. 다섯 가지 직분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역할이다.

전통 교회에서 ‘사도’는 초대 교회 이후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기록하는 사도적 권위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사도가 가지는 고유한 기능은 사라졌다고 할 수 없다. 사도는 보통 지역을 이동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으로, 개척가로 전략가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필리핀 비박 교단은 산악지역을 선교하기 위하여 평신도 사역자를 파송한다. 20년 전 나는 그곳에서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는 ‘아미(Amy)’라고 하는 평신도 여선교사를 만났다. 그녀는 홀로 산악지역에 조그만 방을 하나 빌려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고 예배드릴 장소를 마련하면, 목회자를 청빙한다. 교회가 세워지면, 그녀는 다시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떠나 같은 사역을 반복하였다. 필리핀 교회의 후원이기에 한 달에 10만 원 정도의 적은 돈으로 살면서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존경스럽고 훌륭하여 한국에 초청하였다. 그녀가 한국에서 보고 싶은 것은 큰 교회가 아니었다. 그녀는 산에 있는 기도원을 찾았고, 북한산을 올라가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녀를 안내하는 동안 허약한 체력을 절감하였다. 북한산 위에서 서울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평신도 사역자였지만 사도였다.


선지자는 조직의 정체된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사람이다. 때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여 세상을 요동케 하기도 한다. 현실에 안주하고, 편안이 몸에 밴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다. 그는 공동체의 변화와 성장을 독려한다. 목회 현장에서 물러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선지자 같은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복음전도자는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 나가 세상 사람과 대화한다. 그는 세상을 잘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보통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교회 바깥사람과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교회 내 교인과 관계는 깊어지지만, 교회 밖 불신자와는 갈수록 멀어진다. 오늘날 골수 기독교인의 가장 큰 문제이다. 세상과 소통의 길이 막혀버리고, 세상의 언어와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과 담을 쌓고서는 복음전파자가 될 수 없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면서 막무가내로 복음 전하는 사람은 복음 전파자가 아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된 사람의 아픔과 고민과 눈물을 다 경험하신 예수님은 복음 전파자의 롤모델이다. 복음전도자는 예수님과 같은 심정과 사랑으로 세상에 나가는 사람이다.


목사(목자)는 돌보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고민과 마음을 알아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는 자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고 세상에 다시 나가 영적 전투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자다. 세상과의 관계망이 끊어진 신자들이 이러한 목사(목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교사는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하고 통합하는 사람이다. 교회 안의 다양한 부분에서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 교인들에게 교회의 비전을 설명하고 설득하며 조직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 중에 관객이나 방청객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섯가지 기능 중 한 가지는 가지고 활동하여야 한다. 이 다섯 가지 기능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교회 공동체는 아름답게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다. 교회의 리더십은 목사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기능직이 평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가진다. 목사가 교인을 돌보기는 잘해도, 조직을 이끄는 데는 최악인 경우도 많다. 비전을 제시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선지자 역할은 탁월하지만, 교인과 관계가 안 좋은 사람도 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는 위대한 사명을 주신다. 그런데 바로 앞 절에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함을 보시고 꾸짖으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복음의 위대한 사명을 받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엄중한 꾸지람을 받던 사람이다. 그들은 우리와 다를 바 하나도 없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믿음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은 그들의 능력과 자질을 믿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줄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경험을 기억하고 남한에 내려와 목회하면서 한 가지 원칙을 가졌다. 헌신예배 때 평신도에게 설교를 시켰다. 여선교회 헌신예배는 여자 평신도가 설교하였다. 나는 20살 때 청년부 헌신예배 시간에 첫 설교를 하였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서 지난 20년 동안 담임목회를 하면서 평신도 설교를 적극 장려하였다.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해석 권한을 주면서 만인 제사장 설을 주창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제도화되고 계급화된 가톨릭의 성직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평신도도 성경을 해석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다시금 로마 가톨릭처럼 성직을 계급화하였다. 아버지의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나도 20년 동안 목회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평신도가 설교하면서 이단적 사상을 말하거나 성경의 교리에 어긋난 설교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평신도의 모습에 온 교인이 감동하였다. 오히려 외부 강사로 온 목사들이 때때로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나 비 인격적인 언사를 사용하여 교회에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여러번 있다. 한국 교회가 갱신해야 할 요소가 참 많지만, 그중에 하나는 평신도의 리더십을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성경 해석권을 평신도의 손에 넘겨준 것처럼 한국 교회도 종교개혁 정신을 따라야 할 것이다. 만인 제사장 설이 이론으로 끝나지 말고 현실 한국 교회에 적용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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