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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04. 2019

다산의 행복론

나이 사십. 왕의 비서실장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나이였다. 1800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정약용이 속한 남인은 숙청 되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천주교라는 누명을 쓰고 그는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그가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게 된 뒤에는 서용보가 있었다. 서용보가 경기관찰사로 있을 때, 정약용은 암행어사로 그의 비행을 고발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서용보는 정약용에게 원한을 품었다. 모든 대신이 정약용은 죄가 없으므로 풀어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우의정까지 오른 서용보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서용보는 다산을 강진으로 유배 보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간신배 이안묵을 강진 현감으로 발령하였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다산을 죽이고 싶었다. 이안묵은 정약용이 죄를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왕을 원망한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다산은 병마절도사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지만, 무죄로 풀려났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대역죄인이라고 그를 멀리하였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하여 대나무 가지처럼 바싹 말라버렸다.


마음속에는 억울함,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 서러움, 분노, 복수심 등 온갖 나쁜 마음이 들끓었다. 고향 생각과 처자식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막막함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 이안묵은 그러한 다산을 보고 가만 내버려 두어도 곧 죽을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이안묵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니 비좁은 골방에서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가장 쉬운 일은 원망이다. 자신을 유배 보낸 정권과 서용보를 저주하고 복수를 꿈꿀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저 멀리 한양 땅 벼슬아치들을 저주한다고 해서 얻을 유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자기 몸만 축날 뿐이었다. 다산은 독서와 글쓰기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그는 아들 정학유에게 편지하였다.


“나는 천지간에 외로이 서서 오직 글쓰기에 내 목숨을 의지하며 살아 있을 따름이다. 혹 마음에 드는 글을 한 구절이나 한 편이라도 지으면 홀로 읊조리고 음미하다가 이 세상에서 오직 너희에게만 보여 줄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정약용 산문선집 다산의 마음, 박혜숙 편역, 돌베개, 185)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독서와 글쓰기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청족(맑고 깨끗한 명성이 있는 집안)은 비록 독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존경을 받지만, 폐족(죄를 지어 당사자는 물론 그 자손까지 벼슬길이 막힌 집안)인데도 식견이 모자라면 더욱 가증스럽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이 비루하게 여기는 것도 슬퍼할 만한데, 지금 너희는 또 자신을 천하게 여기고 자신을 비루하게 여기니, 이는 스스로 만든 일이라 슬퍼할 만하다.”(위의 책, 186)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 곁에는 누구도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공부에 정진하면 사람들은 존경하다. 강진 현감이었던 이안묵도 떠나자 사람들은 정약용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학자라고 인정하였다. 강진의 아전 중에 자녀 교육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자녀를 다산에게 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시골에서 머리 좋은 자녀는 모두 공부하려고 한양으로 떠나고, 남은 자녀는 평범하다 못해 수준 미달이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아이들이었지만, 다산은 실망하지 않고 온 정성을 쏟아 가르쳤다. 다산은 여섯 단계로 교육하였다. 첫째 단계별 교육이었다. 다산은 천자문이 아동의 인지 과정을 무시한 점을 깨닫고 직접 교본을 만들었다. 공부는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가 있음을 느끼고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둘째 전공별 교육으로 제자들의 개성과 역량과 취미가 어디 있는지 살펴서 문학과 이학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셋째 맞춤형 교육으로 아이들 하나하나 개별지도를 하였다. 개인의 처지와 성품을 가늠하여 힘써야 할 부분에 역점을 둔 가르침이다. 넷째 실전형 교육으로 자신이 평소 독서하면서 사용하는 초서법(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골라 적고 그 밑에 자기 생각을 적는 방법)을 훈련했다. 다섯째 토론형 교육법으로 다산이 속한 남인 학당이 실천하던 교육법이다. 질의응답과 토론을 통한 심화 학습이다. 여섯째 집체형 교육으로 팀을 이루어 한 가지 과제를 공동으로 풀어가는 방법이었다.


다산의 강진 학당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별 볼 일 없는 아이들을 교육하여 놀라운 학당을 만들었다. 다산이 유배생활 18년 동안 500여권의 책을 쓴 것은 바로 강진 학당의 공동작업 덕분이다. 다산은 작업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제자들과 함께 자료를 수집 검색하고, 초서와 정서를 하고, 수정과 교정과 대조 작업을 하였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정서하고, 역량이 부족하면 카드 정리나 제본 같은 단순작업을 하였다. 누구도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공동학습과 연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하나의 저술이 완성되기까지 다산은 다섯 차례 이상 검토하면서 수정하고 지도하였다. (정민, 다산의 재발견, Humanist, 57-91쪽 요약)


18년 동안 다산 밑에서 함께 작업했던 제자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로 성장하였다. 황상 같은 제자는 평생 강진에서 농사만 지으며 공부하였다. 후일 황상은 다산의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그의 시를 접한 한양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은 경탄해 마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황상을 깊이 존경하며 그와 교분을 쌓기 위하여 강진까지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다.


다산의 책은 학문적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글은 하나같이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였다. 한양에서 벼슬할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백성의 아픔과 눈물을 깊이 성찰하였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목민관(조선의 지방관리)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있는가?” 질문한다. 백성 모두가 함께 살아가도록 군주와 목민관을 하늘이 세웠다고 그는 밝힌다. ‘맹자’를 주해한 ‘맹자요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소망하는 바가 있다. 온 나라가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차별적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사회적 평등을 확립하기를 원했다. (금장태, 다산 정약용, 살림, 129-130쪽) 그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모든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산은 행복하였다. 비록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지만,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을 갈고 다듬었다. 그는 자기 친구 이공택이 사헌부 감찰에서 파직당하였을 때 파직을 축하한다는 편지를 썼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는가? 장사를 하겠는가? 그간 못한 공부를 제대로 해보게. 하늘이 내린 기회일세. 독서를 하고 후학을 길러 그 보람이 만세에 빛나고 그 은택이 세상을 환히 비추게 해주게나.” (정민, 다산의 제자교육법, Humanist, E-book)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마음이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고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고, 행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제자들을 양육하면서 함께 공부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의 글은 단순한 지식 자랑이 아니었다. 그는 백성을 진정 사랑하였다. 2012년 유네스코는 세계 문화 인물로 다산 정약용을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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