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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04. 2019

가곡 '선구자'의 허상

1917년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지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해방 때까지 용정 중앙교회에서 목회하였던 정대위 목사가 있다. 해방 후 그는 초동교회 담임목사로,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초대 총장과 건국대 총장을 지내다 캐나다로 이민을 가 오타와 Carleton대학의 교수를 하였고, 후일 한신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정목사는 ‘나그네의 조국’이란 글에서 가곡 선구자와 얽힌 고향 용정에 대하여 독특한 글을 썼다.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용정에서 목회활동을 했던 그가 생각한 용정은 가곡 ‘선구자’에서 부를 만큼 아름다운 곳도 아니고, 말 달리던 선구자가 뛰어놀던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은 일본이 중국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략 기지로 삼은 곳이다. 1905년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 출장소를 세우고, 일본 헌병 부대가 있던 곳이 용정이다.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본 총영사관이 용정에 세워졌다. 


이범윤, 이상설 씨가 용정에 의병 훈련 기관이 '서전서숙'을 세웠던 것은 일본이 용정을 중국 침략 전진기지로 세우려는 의도를 몰랐을 때 일이긴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1907년 용정 통감부 출장소는 학교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여 1년 만에 폐교하였다. 용정은 독립군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곤욕을 당하여 송장이 되어 나오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용정은 가곡 '선구자'에서 부르는 것처럼 낭만적인 곳도 아니고, 독립군이 말 달리던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독립군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몸을 숨기고 다니던 곳이었다. 가곡 ‘선구자’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해란 강변에서 마음 놓고 말 달리던 사람은 독립군을 잡으려고 설치던 일본군인들이었다. 


정대위는 이렇게 쓴다. 

“내 고향은 그런 곳이다. 일제의 탄압 아래 있던 우리나라의 모든 고초보다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인 데다가 그곳은 우리 땅도 아니고 중국인들에게까지 구박을 받아가며 살아야 하는 우리 실향민들이 나그네 생활을 하던 곳이었다.”1) 

나는 여기서 가곡 ‘선구자’는 어떤 배경에서 쓰였고, 작곡되었는가 살펴보았다. 가곡 선구자를 작곡한 조두남은 수상집 ‘그리움’에서 선구자를 작사한 윤해영을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하였다. 

“1933년 내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키가 크고 작고 마른 체격에 함경도 말씨를 쓰는 그는 시 한 편을 내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그 노래를 곧 찾으러 오겠다고 했기에 나는 작곡을 해 놓고 기다렸으나 그 청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고 간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독립군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에게 왔다간 뒤 어쩌면 어디에선가 전사했을 것이다.”2) 

조두남은 윤해영을 독립운동하던 신비한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다. 과연 윤해영은 독립군이었을까? 윤해영은 정말 ‘선구자’란 시를 썼을까? 조두남은 윤해영과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1. 윤해영은 독립군이었을까? 

윤해영은 독립군이 아니라 오히려 만주에서 친일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었다. 그는 ‘만주 아리랑’, ‘오랑캐 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사계’, ‘발해 고지’, ‘척토기’, ‘낙토 만주’등 일본 제국이 세운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찬양하는 시를 쓰던 친일 시인이었다. 그가 쓴 아리랑 만주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한 만선일보의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이다. 그는 이 시에서 만주국이야말로 낙토의 땅이며 희망이 넘치는 넓은 땅으로 이 땅에 사는 조선인은 복을 받은 백성으로 이 나라에 터를 닦는 선구자라고 찬양한다. 3) 윤해영은 해방되면서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여 북한으로 들어갔고 그 후 행적은 알 수 없다. 4) 


2. 윤해영은 ‘선구자’를 썼을까?

중국 연변 음악계의 원로인 김종화(1921년 화룡현 룡문향 태생) 선생은 1943년부터 선구자의 작곡가인 조두남과 함께 ‘신안진 악단’ 활동을 3년 동안 같이 하였다. 악단은 조두남이 작곡한 노래들을 연주하였는데 ‘한 사나이의 반평생, 농촌의 사시절, 고향 생각’등이었다. 1944년 봄 김종화는 조두남의 소개로 윤해영을 처음 만났다. 당시 윤해영은 친일 단체인 ‘영안협화회’에서 일을 하였다. 그는 '룡정의 노래'를 써서 조두남에게 작곡을 의뢰하였다. 조두남은 김종화에게 그 곡의 기타 연주를 부탁하였다. 1944년 봄 영안에서 조두남은 신곡으로 '룡정의 노래'를 발표하였다. 그 노래는 유랑민의 서러움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시였다. 해방후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룡정의 노래'는 '선구자'로 바뀌어 발표되었다. 곡은 똑같았지만, 가사가 바뀌어 전에 없던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란 가사가 들어가 있었다. 5) 


3. 조두남과 윤해영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까?

김종화의 회고에 의하면 조두남과 윤해영은 광복 전 몇 해 동안 서로 왕래하면서 윤해영의 시 여러 수를 작곡하였고, 윤해영은 집에서 친일파 음악가들과 함께 파티를 하였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윤해영을 조두남은 왜 요절했을 지 모르는 신비한 독립운동가로 바꾸어 소개했을까? 그것은 윤해영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북한으로 넘어갔기에 그를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4. 조두남은 어떤 사람일까? 

조두남은 1912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평양 종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미국인 신부 캐논스(Cannons, J.)에게 음악을 배웠고, 1928년 전후로 교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찬송가 지도자로 지냈다. 그는 활동 무대를 만주로 옮겼고, 만주국의 ‘예문지도요강’에 따라 일본 중심의 국민음악 창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만주작곡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징병제를 찬양하고,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일본 군가풍 국민가요를 작사 작곡하여 보급하였다. 그는 ‘징병제 만세’, ‘황국의 어머니’’아리랑 만주’ 같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면서 왕성하게 음악 활동을 하였다. 6) 마산시는 '선구자'란 곡이 가진 국민적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하여 2003년 '조두남 기념관'을 건립하였지만, 그의 친일 행적이 알려지면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조두남 기념관'을 '마산 음악관'으로 개칭하고 지역의 다른 음악가들의 자료도 함께 전시하는 장소로 바꾸고 나서야 정식 개관을 하였다. 


조두남은 해방 후 ‘선구자’를 발표하면서 작사자와 작곡 배경을 독립운동으로 포장하였다. 아울러 자신도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소개하였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결론적으로 윤해영은 '룡정의 노래'를 썼지 '선구자'란 시를 쓴 적은 없다. 선구자는 윤해영이 북한으로 넘어간 이후 누군가에 의해 개작되어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선구자’란 가곡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이러한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편, 역사는 늘 이렇게 왜곡되고 변형되어 전설이 되고, 나중에는 사실로 둔갑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요즘도 국내는 가짜 뉴스로 언제나 시끄럽다.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세상에서 역사와 문화와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해석하는 눈이 절실히 필요하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고 훈계하셨다. 그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다. 


참고도서

1) 정대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먼 길’(종로서적 : 서울) 1991년

2) 조두남, ‘그리움’ (세광출판사 : 서울) 1982년

3) 전월매, ‘일제 강점기 재만조선시인 범주와 거류형 시인의 만주 인식’ (만주연구 9. 2009년)

4) 오양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대의식 고찰’ (국어국문학 114, 1995년) 

5) 류연산,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월간 말 197, 2002년) 

6) 네이버 지식백과 조두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이성천 “만주국 국책이념의 문학적 투영 양상에 관한 논의 고찰” (한국시학연구 40.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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