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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28. 2018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천이었는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가 전하는 바로는 밀비우스 전투를 앞두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도하는 중에 “이것으로 이겨라’는 제명이 쓰인 빛으로 된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꿈에서도 십자가 표지를 보고 그대로 만들어 전투에 나가 승리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였다고 한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오 다리에서 환상을 보고 전투에 승리한 것을 계기로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과연 사실일까? 콘스탄티누스가 환영은 언제 보았고, 꿈은 또 언제 꾸었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보통 이런 신비스러운 일이 있다면 많은 증언을 함께 기록하기 마련인데 환영을 목격했다는 병사의 증언은 하나도 없다. 오직 열렬한 황제추종자였던 유세비우스만, 그의 책에 기록하였을 뿐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십자가 상징보다는 오히려 물고기나 비둘기, 종려나무 가지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사용한 상징은 P와 X가 교차하는 문양으로 엄밀히 말하면 십자가를 포함한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는 희생, 사랑, 용서 대신 정복과 승리의 상징이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일신교적 태양신 숭배자였다. 그 첫 번째 증거로 주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이다. 그리고 문헌 자료나 찬가와 같은 사료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명백히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주의자였다. 그는 개종하지도 않았고, 세례도 받지 않았으며, 성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가 세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의 수호신으로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이라고 새겨놓았다. 315년 주조된 은 원형 양각에는 전형적인 로마의 상징과 기독교의 상징을 혼합하여 새겨놓았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 337년에 가서야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왜냐하면, 밀라노 칙령이 문서로 남아 있지 않으며, 중세시대 내내 ‘밀라노 칙령’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용어는 16세기, 추기경 바로니우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그는 유세비우스 교회사에 나오는 한 문장을 근거로 ‘밀라노 칙령’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관용적인 칙령은 이미 로마 동부의 황제인 갈레리우스(305-311)가 309년에 발표하였다. 갈레리우스의 뒤를 이은 리키니우스가 전임 황제의 관용정책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라이벌 리키니우스를 제거한 후, 그의 추종자 유세비우스는 종교관용 정책을 리키니우스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가 발표한 것이라 바꾸어버렸다.


밀라노 칙령의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대하여 관용 정책을 펼친 것은 사실이다. 굿이너프(E. R. Goodenough), 맥뮬런(R. Macmullen) 등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전체 인구수에 대한 기독교인의 비율은 낮게는 5%, 많게는 10%로 추정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이란 책에서 예수님이 죽던 해 기독교인의 수는 적게 잡아 1,00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불과 300년 만에 로마 제국의 5%내지 10%로 성장했다면 매년 40% 성장해야 가능한 수치라고 하였다. 기독교는 엄청난 성장을 보였다. 로마의 황제들이 박해와 관용 정책을 번갈아 실시하면서 기독교를 통제하려 하였지만, 기독교는 그와 상관없이 놀랍게 성장하였다. 이제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무시 못할 상황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정세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교세 확장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기독교는 순수하고 자비롭고 보편적인 윤리 체계를 가졌다. 그리고 권위에 대해 무조건 복종하는 모습도 좋게 보였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권위에 순종을 잘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판단이 적고, 악한 권세에도 순종을 잘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였다. 세속의 권위자인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순종적 모습이 지닌 약점을 간파하였다.


3세기 후반 로마는 외적의 침공, 온 백성에게 큰 상처가 되었던 지루한 내전, 역병의 창궐,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병들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을 통일하는 데 기독교가 유용하리라 판단하였다. 그는 기독교가 수많은 박해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훌륭한 윤리 도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무언가 강력한 구심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기독교를 인정한 것은 신앙심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를 살펴보니 기독교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초대 기독교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으며, 많은 생각과 사상을 수용하고 포용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당황하였다. 그는 제국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기독교도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13년 니케아 공의회는 그렇게 해서 소집되었다. 크리스천도 아닌 세속 권력자의 요청으로 교회는 강제적으로 통일을 만들어야 했다. 이제 핍박도 안 하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세금도 면제해주고, 재산권도 확보해주는 콘스탄티누스의 요구에 기독교는 고분고분 순종하였다. 그렇게 기독교는 세속 권세 아래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그동안 기독교는 복음이 로마를 정복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승리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 제국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아래 철저하게 제국주의 종교로 바뀌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였다.


참고도서

1. 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 박규태 옮김 (포이에마 : 서울) 2016년

2.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 상', 윤두혁 옮김 (생명의 말씀사 : 서울) 1993년

3.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이종인 옮김  (도서출판 책과함께 : 서울) 2012년

4. 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 서울) 2017년

5.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 (좋은 씨앗:서울) 2016년

6. 김두식, '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의 교회' (홍성사 : 서울) 2010년

7. 김경현, '밀라노 칙령, 그 신화의 해체',(지식의 지평 15집) 2013년

8. 이승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과 종교정책', (서양고대사연구 38집)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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