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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06. 2018

어거스틴의 잘못

북아프리카 교회

도나투스 파는 박해를 통해 성장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 북아프리카 교회는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다. 그때마다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사람과 신앙을 버리고 배반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언제나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박해가 지나고 나면 변절자들이 교회로 돌아와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 교부였던 터툴리안을 비롯해 키푸리아누스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다시 받음으로 교회에 들어오게 하였다. 후일 재세례는 어거스틴과의 논쟁에 공격 대상이 되었다.


AD 301년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284~305) 황제 박해 때에도 변절자가 생겨났다. 박해가 지나자 변절자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를 소망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박해와 달리 변절자 중에 성직자가 있었다. 그것도 고위 성직자들이었다. 과연 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변절하였던 고위 성직자들은 용서받는 절차를 일절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뭉쳐서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세실리우스를 선출하였다. 세실리우스 역시도 변절하여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세실리우스는 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의지하여 스스로 가톨릭이라고 불렀다. 반로마적 정서가 강했던 북아프리카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북아프리카 교회는 도나투스 파를 지지하였지만, 로마의 권력자인 콘스탄틴은 가톨릭 파의 세실리우스를 지지하였다. 세실리우스 파 성직자들은 정치가들에게 줄을 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콘스탄틴의 고문이었던 호시우스에 따르면, 북아프리카 가톨릭 주교들은 다른 어느 지역 주교보다 훨씬 많은 수가 콘스탄틴의 궁정에 서성거렸다. 그들은 지인의 취직을 청탁하였고, 사치를 일삼았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사례가 좋은 곳을 찾아 이 교구 저 교구로 옮겨 다녔다. 주교들은 다른 교회 교인을 빼앗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독교 공인과 더불어 타락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시 임원단 사진이다. 아랫줄 가운데가 홍택기 목사다.

북아프리카 가톨릭 교회의 모습은 대한민국 교회의 모습과 판박이다. 1938년 일본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신사 참배는 국민의례”라고 가결하였다. 이어서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는 23명의 노회장과 함께 평양 신사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였다. 어떤 목사는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우상 천조 대신의 이름으로 세례까지 행하였다. 이런 와중에 신사참배를 반대한 200여 교회가 파손되었고, 2,000여 명이 투옥되었고, 그중에 50여 명은 순교하였다.


해방되자 출옥 성도와 목회자는 한국교회의 회개와 자성을 촉구하였다. 1945년 11월 14일 선천에서 부흥회 겸 한국 교회 수습을 토론하기 위한 모임이 있었다. 강사는 출옥 성도 이기선 목사와 만주신학원의 박형룡 박사였다. 이때 홍택기 목사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일어나 외쳤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현실 교회를 지키느라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더구나 어려움을 피해 안전한 해외에 가서 지낸 사람이나 낙향하여 시골에서 신분을 숨기고 산 사람이나,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요에 헤아릴 수 없는 치욕을 겪고 굴복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키려고 험한 세상을 살아간 사람이나, 다를 것이 무언가?”


친일파 기독교 지도자의 변신은 놀라웠다. 그들은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정권 잡은 자들에게 줄 대기 바빴다. 그들은 열렬한 ‘애국 반공 투사’로 변신하였고 군부 독재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북아프리카 교회와 대한민국 주류 교회는 쌍둥이다.


기독교가 공인되었지만, 북아프리카 교회는 같은 기독교에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았다. 317년부터 321년, 그리고 346년에서 348년의 박해기간 동안, 도나티스트들은 엄청나게 순교하였다. 가톨릭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콘스탄틴 이전의 변절과 배신에 대한 회개가 없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하여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면서 기독교를 부패하게 한 잘못이다. 부패한 교회가 순수를 지향하는 교회를 박해하였다.


도나티스트는 교회의 순수성을 강조하였다. 형식적 회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며, 세속 권력에 아부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하는 모습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이해하였다. 가톨릭의 박해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도나티스트는 선택 받은 공동체(collecta)라는 정체성을 가지며 고립을 선택하였다.


396년 어거스틴이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런 상황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교회를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지 85년이 지났다. 마지막 박해(348년)가 지나가고 50년 동안 두 파는 서로 갈등할 때도 있었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불편 없이 공존하였다. 100년 전 변절자들은 모두 죽고 없는 상황이다. 도나투스 파와 로마 가톨릭은 같은 라틴어 성경을 사용했고, 동일한 교리를 믿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도나투스 파 교회의 벽을 하얗게 칠했다는 사실뿐이다. 이제 문제는 '교회와 권력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 정도인데 그것은 얼마든지 조정 가능한 국면이었다. 어거스틴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두 파는 서로 화해하고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독일의 빌리 브란트(Willy?Brandt,1913-1992)는 서독의 수상이 된 후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하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헌화하던 도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12월의 추운 겨울이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빌리 브란트는 뜨겁게 참회하였다. 비록 자신은 반 나치운동을 한 사람이었지만,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을 대신하여 회개하였다.


독일의 슈피겔지는 이렇게 썼다.

“이 사람은 그 죄악에 책임이 없고 당시에 거기 있지 않았는데도 옛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그의 의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모든 독일인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질 필요가 없는 죄책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독일을 대신하여 용서를 구하였다.”(의역)


어거스틴이 도나티스 파 앞에 무릎을 꿇고 선조가 저질렀던 모든 죄를 참회하고 눈물을 뿌렸다면, 아프리카 교회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가톨릭 파와 도나투스 파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무릎 꿇는 쪽은 자기가 아니라 도나투스 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승 암브로시우스가 있던 밀라노와 로마에서 세계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보았다. 심지어 황제나 관료들까지 폭넓게 알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가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이 되었을 때, 사회를 변혁시킬 힘이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는 무릎 꿇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설교와 논쟁으로 도나투스파를 굴복시키려 하였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Cogite intrare(그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 눅14:23)은 어거스틴의 표어였다. 그는 세속 정권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다시 한번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411년 6월 가톨릭파 286명, 도나투스파 279명의 지도자가 참여하였다. 결과는 뻔하였다. 회의는 도나투스파를 박해할 명분을 얻기 위한 요식행위로 진행할 뿐이었다. 412년 1월 호노리우스(Honorius) 황제는 도나투스를 엄금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도나투스 파는 이단으로 정죄 되었고, 그들의 시민권은 박탈당하였으며,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다. 도나투스 파 예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죄에 해당하였다.


교리적으로 어거스틴의 주장에 오류는 별로 없다. 그는 도나투스 파 신학자였던 티코니우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회는 순결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허물이 있고 죄가 있을 수 있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농지와 같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작업을 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문제는 그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하지 않고, 이론과 말로만 회개를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한다. 역사는 대부분 승자의 기록만 보존하면서 그들의 입장만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회사가도 어거스틴과 가톨릭의 시각으로 기록된 사료만 보고 도나투스를 이단, 고집불통의 원리주의자, 천년왕국적 종말론자, 위험한 열광주의자, 심지어 사회 반란자로 묘사하였다.


어거스틴 이후 국가와 교회의 조직적인 박해로 도나투스 파는 세력이 점점 약해졌다. 결과적으로 이슬람이 아프리카를 침략했을 때 도나투스 파는 그들을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북아프리카 기독교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도서

1. 헨리 채드윅, 초대 교회사,  서영일 옮기, (기독교 문서선교회 : 서울) 1983년

2. 쿠어트 알란트, ‘인물로 본 초대 교회사’ 김성주 옮김 (엠마오 : 서울) 1992년

3.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서양철학사’ 김태길, 윤명노, 최명관 옮김 (을유문화사 : 서울) 1977년

4. 도날드 K. 맥킴, '9가지 신학 논쟁', 장종현 옮김, (기독교연합신문사 : 서울) 2007년

5. 안인섭, '새롭게 조명하는 4세기 북아프리카 교회의 발전과 영성’ (한국기독교교회 제17집) 2005년

6. 이현준,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주의의 교회일치와 국가 관계론 연구’ (신학연구 65)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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