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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18. 2018

제국과 교회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로빈 마이어스 교수는 그 상황을 간단하게 말하였다. “깨어보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침대였다.” 어제까지 교회는 온갖 멸시와 비난을 받던 처지에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성직자들에게 봉급을 지급하고, 세금을 면제해주고, 금을 입힌 거대한 교회를 건설하였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밀어준다는 소식이 로마에 퍼지자, 권력에 줄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밀려들었다. 그들도 황제를 따라 큰돈을 헌금하며 경쟁적으로 교회를 지어주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헌금은 차고 넘쳐났다. 


돈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권세도 주어졌다. 전에 교회를 핍박하던 칼과 창으로 이제는 교회를 보호하였다.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음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를 13번째 사도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교회 역사는 콘스탄티누스 이전(Before Constantinus)과 이후(After Constantinus)로 구분하였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사단보다 한 수 위였다. 엎드려 경배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먼저 만국의 영광을 주었다. 물질과 권력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앞에 교회가 무릎 꿇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하였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가 세례를 받지 않았고, 신앙도 고백하지 않았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문제는 없었다. 오직 돈과 권력이 말할 뿐이다. 지금도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게 통일을 요구하였다. 초대교회는 다양성이 있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막교부들, 교회의 순수성을 주장하던 북아프리카 교회, 권력에 줄을 대보려고 애를 쓰던 로마 가톨릭이 있었다. 성경 해석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양성을 용납할 수 없었다. 무조건 통일, 아니 획일을 요구하였다. 


그는 니케아 호숫가에 있는 자기 공관에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교회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개인 저택에서 모였다. 그는 모두 한 방에 집어넣고 자신의 명령에 따라 의견을 통일할 때까지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소위 니케아 공의회였다. 성경학자들이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연구하고 토의하여 기독교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다. 황제의 공권력에 교회가 굴복하여 억지로 만들어 낸 교리였다. 


전에는 황제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형당했다면, 이제는 (불신)황제가 결정한 기독교 교리와 다르기 때문에 처형당하였다. 콘스탄티누스와 동침한 교회는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말을 하면 모두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였다. 기독교가 기독교를 죽이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황제가 누구 편에 서느냐의 싸움이 되었다. 

북아프리카 교회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회주의자들과 이중인격자들과 배신자들은 권력자와 손잡는 데 선수다. 데시우스 황제 기간 믿음을 저버리고, 성경을 불태우고, 신실한 신앙인들을 굶겨 죽였던 세실리우스는 재빨리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줄을 대었다. 권력자는 언제나 자기 말 잘 듣고 아첨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북아프리카 교회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세실리우스를 카르타고의 정통 주교라고 선언하였다. 황제는 북아프리카 재무장관인 우르수스(Ursus)에게 명하여 세실리우스에게 3,000냥(folles)까지 마음껏 쓸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동시에 박해기간 몰수한 교회의 땅과 재산도 모두 돌려주었다. 말 안 듣는 사람을 처단할 재판권까지 주었다. 


약삭빠른 성직자들은 세실리우스 밑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세실리우스는 그들에게 지방세를 면제해주고, 교회도 지어주고, 물질적 지원도 해주었다. 돈은 자기 세력을 키워가는 첫 번째 수단이다. 여기서 도나투스파가 판단 착오를 범하였다. 그들도 세속 군주인 콘스탄티누스에게 탄원하였다. 세속 군주를 교회 심판관으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결론은 뻔하였다. 


황제가 자기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도나투스파의 손을 들어줄 리 만무하다. 진리에 바로 서서 황제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할 것 같은 도나투스파를 인정할 리 없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할 때는 기독교가 국가 종교로서 국가 정책에 고분고분 순종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군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 누구보다도 먼저 로마군에 지원하였다. 교회는 로마군에 충성하라고 설교하였다. 마치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였을 때 일본군에 입대하라고 설교하던 목사들과 같았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에서 전쟁의 종교로, 진리의 종교에서 돈의 종교로, 약자의 종교에서 강자의 종교로, 섬기는 종교에서 다스리는 종교로 바뀌었다. 


여러차례 회의를 했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졌다. 세실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정통성 있는 주교이고, 이에 반대하는 도나투스파는 교회를 분열하고 혼란에 빠트린 자들로 정죄 받았다. 317년 봄, 마침내 반도나티스트 법령이 공포되었다. 도나티스트들의 교회는 몰수되었고, 지도자들은 추방당하였다. 카르타고 시 외곽 산에 있는 한 도나티스트 교회에서는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고, 아드보카타(Advocata)주교와 시실리바 주교 호노라투스(Honoratus)는 피살되었다. 


여기서 도나투스파는 큰 교훈을 얻었다. 세속 권력에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된다. 권력에 기대어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는 없다. 교회는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공동체다. 이 싸움은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 계속해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돈 문제 이면에, 더 큰 문제 곧 세상 나라(가치관, 정신, 권력,돈, 지위)를 지향하는데 있다. 


참고

1. 로빈 마이어스, '언더그라운 교회',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 : 서울) 2013년

2. 이현준 '초기 북아프리카 교회론 연구' 서울 기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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