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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11. 2018

북아프리카 교회와 박해

초대 교회는 박해를 통하여 순수성을 검증받았다. 누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 차별과 멸시와 배척을 각오해야 했다. 심지어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종교를 선택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교회 생활하면서 적당히 영혼의 안식을 얻고, 세상에서 복을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앙생활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꾸고 삶의 스타일을 바꾼다는 의미였다.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면에서 고난과 박해는 유익이었다. 문제는 평화시기였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조금만 평안해도 어느새 거기에 젖어들어 편한 게 좋고, 안락한 게 익숙해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로마 제국은 박해와 관용을 적절히 섞어서 기독교를 무너트리려고 하였다. 교회의 존립은 세상의 이러한 강온전략에 흔들리지 않고 그들이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숙제가 있었다. 이 숙제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북아프리카 교회도 로마의 강온전략에 시험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121~180)는 지혜로운 왕으로 스토아 철학에 정통하며 ‘명상록’을 써서 널리 알려졌다. 그가 지혜로운 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기독교를 박해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아우렐리우스 치세 때 북아프리카도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순교를 불사하며 신앙을 지켰던 기독교는 북아프리카의 반로마 정서와 편승하여 널리 퍼져 나갔다.


간헐적인 박해가 지나간 후, 249년 말 데시우스(249~251) 황제는 로마 신상 숭배를 칙령으로 내리며 대대적인 박해를 하였다. 1년 남짓한 짧은 박해였지만, 한동안 평안 가운데 있던 북아프리카 교회는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평안에 익숙해진 교인 중 상당수가 변절하였다. 그들은 단체로 가서 황제 숭배 예식에 참여하였다. 마치 일본 강점기, 교회가 단체로 신사 참배하러 가던 모습과 흡사하였다. 어떤 이들은 뇌물을 사용하여 황제 숭배 예식에 참여하였다는 거짓 증명서를 발급받기도 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코넬리우스(Cornelius)가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을 때 박해기간 변절한 자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뇌물을 사용하여 황제 숭배 예식에 참여하였다는 거짓 증명서를 발급받은 사람은 즉각 사면하였다. 황제 숭배 예식에 참여하였다 할지라도 임종을 앞둔 사람이 고해성사하면 바로 사면하였다. 또한, 감독과 전 회중이 단체로 황제숭배를 한 경우도 사면하였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변절하여 황제 숭배를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순교자나 고백자의 용서 편지가 있는 경우 사면하였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이 사면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보던, 북아프리카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는 임종에 처한 그리스도인 외에 변절자에 대한 사면은 가볍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변절자를 옹호하는 측과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측으로 구분되었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변절자들이 철저히 회개한 이후 다시 세례를 받아야 교회 공동체로 받아주었다. 이 전통은 박해와 변절을 거듭하면서 생긴 전통으로서 일찍이 교부 터툴리안도 재세례를 지지하였다.

데시우스 박해가 지나간 후 반세기 동안 교회는 다시 평화를 찾았다. 기독교는 부흥하였고, 식민 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번성하였다. 이는 디오클레시안(Diocletian, 284~305) 황제 박해 때 독으로 작용하였다. 디오클레시안은 기독교 탄압 칙령을 발표하여 성경과 성물, 교회 재산을 불 태우거나 몰수하였다. 기독교 모임도 금지하고 황제 숭배 예식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황제의 칙령에 도피하거나 순교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언제나 그러하듯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여 배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보관하던 성경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요즘 책은 단돈 만 원이면 살 수 있지만, 당시에 책은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심지어 세실리우스 주교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신앙을 지키다 감옥에 체포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음식까지 차단하여 굶겨 죽였다.


박해가 끝난 후 공석이었던 카르타고의 주교로 세실리우스를 선출하였다. 교회의 순수성을 열심히 지켰던 고원지역의 교회 대표들이 참여하기 전에 식민도시 주교들이 급하게 정하였다. 12명이 참여해서 결정해야 할 일을 단 3명이 결정하였다. 세실리우스를 새 주교로 선출한 사람들은 변절자들이었다.


교회는 완전히 두 동강 났다. 하나는 고원지대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힘썼던 도나투스파와 식민도시를 중심으로 교권을 잡은 로마 가톨릭 파였다. 그래도 절대다수는 도나투스파를 지지하였다. 도덕성도 없고 지지기반도 없는 세실리우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왔다.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로마에서 왔다. 새롭게 등장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세속 군주가 교회 분열에 끼어들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G.K. 체스터톤은 말하였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제국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었으나 교회를 위해서는 나쁜 것이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세실리우스는 권력과 손을 잡았다. 교회와 권력이 손을 잡은 교권주의자들의 행보가 교회를 어떻게 망치는가? 슬픈 눈으로 이제 전개될 역사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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