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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08. 2018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는 한니발(Hannibal, B.C.247~183) 장군에게 부하들은 말렸다. 그때 한니발은 말하였다. "나는 길을 찾거나 아니면 만들어서라도 가겠다." (aut viam inveniam aut faciam)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하였다. 4만 명이 출발하였는데 알프스를 건너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는 2만5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 앞에는 75만의 로마군이 있었다. 적진 한 가운데 들어간 한니발은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전략과 전술로 로마를 무찌르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조국 카르타고는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마치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원하지 않았던 선조 임금과 같았다. 결국, 한니발의 패배와 더불어 카르타고 역시 멸망하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모든 남자를 학살하고, 모든 여자와 아이를 노예로 잡아갔다. 심지어 나무와 풀까지 불사르고 소금을 대량으로 뿌려, 다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카르타고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는 황무지로 변하였다.

북아프리카 백성이 로마를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북아프리카 민중의 뼛속까지 로마에 대한 증오심이 자리하였다. 북아프리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카르타고가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나, 로마가 그곳에 식민지로 건설하면서였다. 북아프리카는 지형적으로 비옥한 해안지역과 황무한 내륙의 고원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로마는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지금의 튀니지, 북알제리, 모로코 일부 지역이다. 


내륙은 누미디아를 중심으로 모리타니 시티펜시스(Mauretania Sitifensis) 그리고 일부 비자세니아(Byzacenia) 지역이다. 그곳 토착민들은 가난을 벗 삼아 살고 있었다. 식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빠르게 로마화 하였지만, 토착민들은 반로마 정서가 여전하였다. 그들은 문화와 문명에서 소외당하였고, 가난하였고, 멸시받는 존재였다. 


기독교가 북아프리카에 들어갔을 때는 1세기 후반부터였다. 그러나 북아프리카는 이미 새턴(Saturn)과 샐레스티스(Caelestis)를 숭배하는 토착종교가 널리 퍼져있었다. 새턴은 영원한 신이며 정복당하지 않는 거룩한 분으로 북아프리카인들은 믿었다. 4세기 말 문법교사였던 마다우로스의 막시무스(Mazimus of Madauros)는 새턴을 ‘시작도 없고, 자손도 없으신 최고의 존재’라고 하였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신이었고, 이생의 삶뿐만 아니라 내세의 구원까지 보장하였다. 기독교의 신관과 비슷하였다. 


그런데 240년과 275년 사이 불과 30년도 안 되어 새턴 숭배가 기독교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학자들은 이유를 여러 가지로 탐구하였지만,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였다. 내가 추정하는 답은 이러하다. 


당시 새턴 숭배자들은 로마 식민지에서 로마 권력과 손을 잡고 로마화를 시도하였다. 반로마 정서가 강했던 북아프리카인들은 그러한 새턴 숭배자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권력과 손잡고 권력에 편승하여 잘 살아 보려는 종교인은 예나 지금이나 좋게 보일 리 만무다. 


반대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였다. 기독교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지켰다. A.D. 180년 누미디아 출신 기독교인 12명이 체포되었다. 카르타고 인근의 스킬리(Scili)라는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이었다. 5명의 여성을 포함한 12명은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체포 투옥되었다. 회유와 협박, 설득과 폭력이 한 달간 진행되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A.D. 180년 7월 17일 12명 전원이 순교하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모습은 누미디아 토착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한다.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교부인 터툴리안도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권력에 아부하는 새턴 숭배자와 달리 기독교인은 비록 평범한 평신도임에도 자기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였다. 그건 충격이었다. 


기독교는 흩어진 나그네의 종교였고, 약자의 종교였고, 억압받는 자의 종교였다. 기독교는 정의와 평화를 말하였다. 기독교가 말하는 정의는 힘의 정의가 아니고, 가진 자의 정의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백성을 섬기는 정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정의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고, 약자들 곁에 기꺼이 서주고, 억압받는 자를 위로하는 종교였다. 특별히 성경은 고통받는 취약 계층을 배려하는 정의를 가르쳤다. 


반면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든 로마는 착취와 억압을 일삼았다. 처음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로마는 고원지대 농민들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해안 비옥한 평야 지대 농산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AD 300년경, 올리브 재배를 시작하면서, 고원지대 올리브가 품질도 좋고 수확량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평화롭게 살던 고원지대 농민들은 올리브 생산자들로 바뀌었고, 그것은 풍요를 가져다주기는 커녕 오히려 노동력 착취, 세금 착취, 생산품 착취로 이어졌다. 그곳에 정의와 평화는 없었다. 


성경 속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는 절망과 억압 속에 있던 북아프리카 토착민들에게 단비와 같은 메시지였다. 기독교 복음은 영적인 차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복음이었다. 북아프리카의 토착 종교 새턴이 30년도 안 되는 시점에 완전히 사라지고 기독교로 대체된 것은 그런 사정이 있었다. 


북아프리카 기독교는 단순히 가난한 토착민들에게만 퍼진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영성, 도덕성, 사회성뿐만 아니라 질서정연한 논리와 신학이 도시 지식인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 이제는 고원지대 농민들뿐만 아니라 식민지 도시까지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로마 시대 북아프리카 기독교는 주류가 되었다. 


기독교가 주류가 되면 나타나는 안 좋은 현상이 북아프리카에도 나타났다. 주류 기독교는 권력과 손을 잡고 부와 명성을 쌓아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식민도시의 교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로마화가 진행되었다. 권력자의 눈치나 살피고,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아 볼까 생각하는 귀족 종교인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로마식을 추구하였고, 자연히 계급화 조직화를 갖추었고, 눈치 빠르게 권력자와 손을 잡았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서서히 양분되었다. 해안가 식민도시를 중심으로 한 로마화 된 기독교(로마 가톨릭)와 고원지대와 뜻있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토착 기독교(도나투스파)로 나뉘었다. 그래도 절대다수는 도나투스파를 지지하였다. 이 둘이 본격적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로마 제국을 이끄는 황제의 변덕 때문이었다. 


이 글은 서울 기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인 '초기 북아프리카 교회론 연구'(이현준, 2008년)에 힘입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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