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Nov 02. 2018

로마 제국과 가톨릭의 발생

현대는 종교가 개인의 문제이지만, 고대인은 종교를 집단 문제로 이해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개념을 가지면서도 철저하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구분하였다. 반면에 다른 세속국가는 왕이 곧 제사장이요 선지자 역할을 하였다. 왕과 제사장의 역할이 나뉠 경우, 왕은 신의 아들이거나, 혹 신으로 여겼다. 고대 이집트는 신의 아들로, 바빌론이나 로마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였다. 이점이 구약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의 차이점이다.


로마 시대의 국가 종교는 황제숭배였다. 로마는 다양한 종교를 포용한 듯 보이지만, 국가 종교인 황제 숭배 아래 들어올 때만 포용하였다. 국가 종교는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지키고, 백성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로마 황제는 대제사장(Pontifex Mazimus)으로 종교를 관장하며 신들에 대한 예배 일체를 규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로마의 정치, 종교적 상황을 이해해야 초대교회의 고민과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초대 기독교는 출발할 때부터 정치와 종교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왜냐하면, 초대 기독교는 국가를 기반으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교처럼 나라를 기반으로 한 종교였다면, 세상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기독교는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며 신앙을 이야기하였다. 사도들은 세속의 국가를 상대화하고, 하나님 나라를 절대화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세상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다. 여기서 세상 권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선언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그들은 처음부터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14.30)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16.11)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를 ‘땅의 큰 음녀’라고 하였다. 이것이 세상 권력을 대하는 기독교의 한 모습이다.


다른 모습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 권력’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초대 교인은 로마의 정치권력을 인정하고, 법률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로마 제국의 안녕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스킬리움의 순교자인 도나타(Donata)는 재판관 앞에서 말했다. “나는 황제에게 합당한 경의를 돌립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만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할 수 없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나라의 질서와 안녕을 해하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 사상 아래 들어오지 않는 기독교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박해하면서 기독교를 굴복시키려 하였지만, 기독교는 고분고분 정치 권력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한 기독교의 모습은 당시 로마 식민지에서 큰 영향력을 끼쳤다. 로마는 지중해 연근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황제 숭배 아래 복속시켰다. 그들이 비록 로마 아래 들어가긴 했지만, 그들 가운데 민족주의적 성향이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때 순교를 각오하고 로마에 저항하면서도, 바른 윤리와 정신과 신앙을 가르치는 기독교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로마 식민지에서 민족주의적 생각을 하는 사람은 대거 기독교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 제국 아래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던 농민들, 나그네들, 약자들 사이에서 더욱 강하게 퍼져 나갔다. 로마의 앞잡이나 로마 밑에서 빌붙어 먹고 사는 기득권층은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기독교가 점점 확산되면서 로마의 일부 지식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들은 기독교의 윤리와 정신과 신앙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은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 같은 사람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 문학, 철학, 법률에 능통한 지식인이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 아무 힘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웅적으로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했고, 마침내 기독교로 개종하여 후일 교부가 되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도대체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Quid Athena Hierosolymis?) 그는 헬라 사상이나 로마 제국은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교회의 순수성, 도덕성, 거룩성을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안타깝게도 터툴리안과 다른 생각을 가진 기독교인도 있었다. 로마와 타협하고, 로마의 첨단 문명과 문화를 흡수하고, 로마의 귀족처럼 멋진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속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성공 지향적이고, 계급의식(hierarchy)이 뚜렷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력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처음 교회사를 쓴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3~339)다. 그는 콘스탄티누스를 위대한 왕으로 경배하였다. 지상 제국은 하늘나라의 그림자이며, 군주정치는 한 분 하나님의 통치를 모방한 것이다.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므로 한 명의 황제만 있어야 한다.’ 그는 콘스탄티누스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본 것은 황제가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와 하나님을 연결하기 위하여 신화를 썼다. 밀비우스 전투 전에 환상과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십자가를 보았다고 썼지만, 당시 역사가 중 누구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였다고 했지만, 그 역시 허구였다. 현대 역사가는 밀라노 칙령의 실체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1)


식민지를 기반으로 한 반 로마적 민족주의 세력을 기반으로 한 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권력 옆에 서 있기를 원하던 가톨릭 세력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충돌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으로 본격적으로 점화되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는 도덕성 없는 로마 종교보다 순종적이고, 도덕성이 있고,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이용한다면, 유익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자신이 신으로 추앙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대제사장(Pontifex Mazimus) 지위를 가지고 종교를 관장하고 통솔할 수 있다면,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로마 제국 안에서 암 덩어리 같던 기독교도 수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하였다.

니케아 회의(Councils of Nicaea)

그는 죽을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그는 죽기 몇 달 전에야 세례를 받았다.), 성찬이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제사장(Pontifex Mazimus)으로서 기독교를 통일시키는 니케아 회의(Councils of Nicaea)를 소집하고 주관하였으며, 기독교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국가 종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기독교는 대거 환영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정체와 본 마음을 알면서 기독교는 양분되었다. 세속의 권력과 거리를 두거나 대항하면서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무리와 로마 권력과 손잡고 나아가려는 로마 가톨릭과의 갈등과 싸움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는 자는 이단으로 낙인찍혀 사라져갔다.


그중 대표적인 케이스가 도나투스파였다. 도나투스파는 신론이나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서 충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교리는 건전하고 보수적이고 바른 가르침을 유지하였다. 그들이 부딪친 것은 교회론이었다. 도나투스파는 로마의 박해 아래 신앙을 저버리고 배반하였던 성직자들이 집례하는 예배와 성례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교회는 거룩성을 주장하던 도나투스파는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온갖 핍박과 따돌림을 받으면서 7세기경 역사에서 사라졌다. 권력에 기대어 부패한 종교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힌 도나투스파의 교회론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주 1) 고대 사학과 교수인 김경현 교수의 논문 '밀라노 칙령, 그 신화의 해체'(지식의 지평 15집) 2013년을 참고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