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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26. 2017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시 ‘낙화’ 첫 문장이다. 사랑이 식어지고 이제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옴을 시인은 알았다. 순수한 사랑이 식어짐과 함께 청춘도 끝나고 있음을 시인은 노래한다.


십 대에 이 시를 읽었더라면 느낌이 달랐겠지만, 난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다. 청춘의 사랑보다 인생의 앉고서야 할 자리가 있음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후배에게 물려주고 떠나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미적거린다면 추할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하였다.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527?~460? BC)는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 그리스의 영웅이다. 그는 페르시아가 마라톤 전쟁에서 패배한 설욕을 갚기 위해 다시 공격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는 다음 전쟁이 바다에서 결론 날 것을 예상하고 배를 만들고 해군을 훈련하자고 하였다. 마치 왜군의 침입을 예상한 율곡 이이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것과 같다.


당시 아테네는 해군과 거리가 먼 나라였다. 에게해에서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고린도가 100척의 갤리선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스는 몇 십척에 불과하였다.  데미스토클레스는 200척의 배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누가 봐도 무리한 주장이었다. 더욱이 마라톤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리스는 안심하고 있었다. 아테네 정치가들은 페르시아가 이집트의 반란을 제압하느라 그리스를 다시 공격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평화는 10년 동안 지속하였고 사람들은 느슨해졌다. 데미스토클레스는 10년이란 세월을 허송하지 않았다. 그는 정적을 하나둘 추방하고 자기 계획대로 200척의 군선을 건조하였다.


마침내 페르시아가 다시 공격하였을 때 데미스토클레스의 예상대로 바다에서 결론이 났다. 데미스토클레스가 그렇게 열심히 군선을 만들었지만, 페르시아 해군에 비교해 1/3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데미스토클레스는 에게해의 해류와 지형을 잘 이용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 13척으로 명량해협에서 왜적선 133척을 격파한 스토리와 같은 게 그리스에도 있었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유인하여 격파하였다. 단단한 판옥선으로 왜군의 배를 깨트린 것처럼 튼튼한 삼단 갤리선으로 적선을 깨트렸다. 많은 군사를 태우고 빠르게 이동할 목적으 만든 페르시아 군선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불과 7시간의 전투에 불에 타거나 침몰한 페르시아 군선은 300~400척이었다. 이에 비해 그리스 함대는 40척만 잃었을 뿐이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일약 영웅이 되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리스 최고 지도자인 아우토크라토르에 재취임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의 나이 불과 44세였기에 얼마든지 최고 지도자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아직 페르시아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다.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페르시아 육군 20만 명은 건재하였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페르시아 육군을 물리쳐야만 했다. 데미스토클레스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아테네 규정에 최고 지도자 임기는 1년이었다. 그래도 전시이기에 아테네 시민은 규정을 잠시 유예하고 승리를 위해 데미스토클레스를 다시 뽑을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데미스토클레스는 마다하였다. 그는 기꺼이 뒤로 물러나고 야당 지도자로 추방하였던 아리스티데스와 크산티포스에게 양보하였다.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모든 인재를 활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추방한 야당 지도자를 귀국시켜 자기 뒤를 있게 하였다.


데미스토클레스는 물러날 때를 알았다. 시작과 끝을 내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국정을 잘 이끌고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 국가를 위하여 개인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예측대로 그리스는 육지에서도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그리스 시은 데미스토클레스의 결단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16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데미스토클레스는 이제 60이다. 지금은 60이 팔팔한 나이지만 고대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었다. 그런데 야당 지도자들은 데미스토클레스를 염려하여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들은 추방으로 만족하지 않고 금 200달란트라는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던 그는 결국 원수의 나라인 페르시아에 자기 몸을 의탁하였다. 마치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에 도망친 다윗과 같았다. 크세르크세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그를 환대하였다. 그에게 마그네시아 두 지방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순신이 패전하여 도망치는 일본해군에 무모할 정도로 돌격하여 죽음을 자초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선조가 옥사에서 이순신을 풀어주며 ‘다시는 돌아오지 말고 전장에서 죽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살면 역적이 되고 죽으면 영웅이 되는 법이다. 이순신은 자기가 떠나야 할 때를 알았다. 사실 데미스토클레스도 떠나야 할 시간을 알았다. 명예롭게 떠나고 싶어 했지만, 속 좁은 야당 지도자들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대학원 시절 무능 교수 5명을 찍어 학교에서 쫓아내는 운동을 하였다. 강의를 잘 못 하는 교수가 대상이었다. 그때 은퇴 6개월을 앞둔 노교수도 무능 교수에 지목되었다. 평생 학교 발전을 위하여 애를 쓴 노교수를 말년에 무능하다고 찍어내 버리려는 학생들이 야속하였다. 몇몇 학우들과 함께 노교수를 구제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다행히 그분은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개혁이라는 명분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생각 없는 행동을 하였나 후회가 된다. 요즘 SNS에 보면, 누구의 허물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마치 정의로운 양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젊었을 적 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나도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점점 가까와온다. 명예롭게 떠나야 하는 데 걱정만 앞선다. 이루지 못한 일이 아직 많은 데 시간은 없다. 늘 부족함과 모자람 때문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를 보고 싶은 욕심으로 아직 머뭇거리고 있다. 나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텐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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