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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0. 2017

정철과 최영경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 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가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쌀쌀하고 담담한데, 그윽히 풍겨 오는 향기는 무슨 일인고?

황혼에 달이 따라와 베갯머리에 비치니,

느껴 우는 듯 반가워하는 듯하니,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를 꺾어 내어 임 계신 곳에 보내고 싶다.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꼬? “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쓴 사미인곡 중 일부분이다. 송강은 당쟁의 와중에 귀양을 가서 임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에 빗대어 임금에 대한 충정을 표현하였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학자라고 하면 모두 한시를 쓰던 시절 송강은 한글로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등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표현기법이 다양하였고 언어 구사가 절묘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이 그의 시를 읽고 공부한다.


그러나 그의 칭찬은 딱 여기까지다. 그는 문인이나 학자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다혈질이었던 정철은 흑백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란 생각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돌격하는 행동대장 같은 사람이었다. 정치에 꼭 필요한 타협과 포용은 몰랐다. 속이 좁았던 정철은 기축옥사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중에 최영경이란 사람이 있다. 최영경은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바른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상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고, 걸음걸이 하나도 조심스러웠다. 선조 6년에 재야에 묻혀있는 선비를 추천하라 했을 때 최영경이 추천을 받아 벼슬을 받았지만, 그는 사양했다. 온전한 옷 한 벌이 없어 외출할 때는 남의 옷을 빌려 입어야 했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최영경의 이름은 선비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남의 말을 하지 않던 최영경은 자신의 벗이 당대 권력자인 정철에 붙어 명리를 추구하자 한마디 하였다.

“정철은 본래 성품이 소인이다.”

아무런 벼슬도 없던 최영경이지만, 그의 인품과 학문 때문에 그의 말은 영향력이 있었다. 마침 정여립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우의정 정철이 그 사건을 처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평소 최영경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정철은 최영경을 모함하였다.


“최영경은 역적 정여립과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최영경이 역적과 결탁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무시하였다. 여기서 포기할 정철이 아니었다. 정여립 역모 사건에 중심인물로 지목되었던 길삼봉이 잡히지 않았다. 길삼봉이란 인물이 실제하는지도 모른 체 갖가지 소문만 떠돌았다. 여기서 다시 최영경을 모함하였다.

“길삼봉이 곧 최영경입니다.”

말도 않되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최영경은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그때 오성 이항복이 정철을 찾아가 말하였다.

“이 옥사가 시작된 지 이미 해가 지났는데도 어디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지목한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지금 무던히 들은 말로써 최영경을 잡아 가두었다가 불행히 죽게 되면 반드시 공론이 있을 것이외다. 그때 가서 대감이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겠습니까?”


옹색한 소인이었던 정철은 이항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국문 장에서 최영경을 조롱하며 고문하였지만, 최영경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최영경에게 물었다.

“선생이 여러 달 동안 옥에 있으면서 혹시 조그만 동요라고 있었습니까?”

“죽고 사는 것을 잊은 지 이미 30년이 지났네.”


국문 장에서 최영경은 정철에게 항변하였다.

“간악한 무리가 이렇게 죄를 얽어 모함하였다.”

“간악한 무리라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바로 그대 같은 무리를 말한다.”

정철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즉시 자리를 피해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욕먹었네. 욕먹었어.”라고 하였다.


최영경은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대궐을 향해 앉았다. 그는 단정히 꿇어앉아 어디 기대는 법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먹고 난 후 기색이 파리해진 최영경이 옥사에 함께 갇혀 있던 박사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사람들은 그의 위독함을 알고 가족에게 연락을 취했다. 가족은 최영경의 병세를 파악하기 위해 글씨를 한 장 써달라고 했다. 이에 최영경은 조용히 일어나 바를 정(正)자를 크게 썼는데 글자 획이 비뚤어졌다. 최영경은 박사길을 돌아보면서 “그대는 이 글자를 아는가?” 하고 묻고는 이내 죽었다.

결국, 최영경의 죽음은 큰 문제가 되고 정철은 파직당하였다. 한때 정철을 신임했던 선조는 최영경의 죽음과 관련하여 한마디 했다.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 (兇渾毒澈殺我良臣)

최영경이 죽은 지 3년 후, 정철은 1593년 12월 18일 강화도 송정촌에서 58세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정철이 죽음에 임했을 때 둘째 아들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정철의 입에 흘려 주었다. 살며시 눈을 뜬 정철이 한마디했다.

“이 아이가 헛된 일을 하는구나.”


죽음을 앞둔 최영경은 마지막 힘을 다해 바를 정자 하나를 썼다. '나는 부끄러울 것 없는 바른 삶을 살았다. 비록 벼슬도 하지 못했고, 재산도 남겨주지 못했지만, 선비로서 가져야 할 자세인 바른 삶과 바른 정신을 남겨주었다.'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 나는 무슨 글자를 남겨놓을까?


60이 다 되어가는 이 순간까지 집 한 채 없고, 단돈 1억도 모으지 못한 처지다. 앞으로 남은 생애 죽도록 힘쓴다고 해서 몇 푼이나 모을 수 있을까?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놓고 갈까?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남겨준다고 해서 자녀들이 그것을 바르게 쓴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어려서부터 오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온 인생인데 남겨줄 것은 신앙밖에 없는 듯하다. 기왕 남겨줄 신앙 바르게 남겨주고 싶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기억 못 해도 자녀들만큼은 우리 아빠는 신앙 가운데 일생 참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인 봄에 나는 겨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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