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혁을 꿈꾸었던 조광조의 한계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났을 때 백성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우습다. 그 노구
원수다. 그 노구
깨졌다. 그 노구" 1)
연산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없었고 그저 구중궁궐에서 고이 자란 왕자로서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생모가 비운에 죽어간 슬픈 개인사와 잔혹한 성품과 음란한 품행으로 자신을 망쳤다. 연산군의 무도함이 권문세족의 이익까지 침범하는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그들은 왕을 몰아내었다. 반정(反正, 쿠데타)에 성공한 공신(功臣, 지배 귀족) 역시 본질에서는 연산군과 다를 바 없이 부패한 자들이었다. 아무리 폭군이라 하지만, 왕을 쫓아낸 그들은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개혁성향을 가진 사림(士林)세력을 끌어들인다.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지방에서 성리학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며 도학 정치(道學政治)를 꿈꾸던 무리였다. 그들은 당대 도덕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꿈꾸던 이상 사회는 모든 사람을 도덕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학을 국정교과서로 만들고 온 나라 백성에게 소학을 읽게 하였다. 중종 12년 6월 27일 홍문관은 '소학' '열녀전'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종 13년 7월 2일 소학 1,300부를 찍어 관료와 종친에게 나누어주었다. 소학 1,300부 출판하는 일은 엄청난 국가적 사업이었다. 중종은 소학을 경연의 텍스트로 삼았다.
그러면 소학은 어떤 책인가? 소학은 남송시대 주희가 쓴 것으로 아이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마음과 태도를 철저히 가르쳐 완전한 도덕적 인간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두었다. 소학은 인간의 일생과 일상을 포괄하여 가르치되 매우 구체적인 행동 규범까지 정하였다. 식사예절은 다음과 같다.
밥을 뭉치지 말며, 밥을 크게 뜨지 마라.
음식을 앞에 놓고 혀를 차지 마라.
뼈를 깨물어 먹지 마라.
먹다 남은 생선이나 고기를 다시 그릇에 놓지 마라.
국을 들이마시지 말고, 국에다 다시 간을 하지 말며 이를 쑤시지 마라.
물기가 있는 고기는 이로 끊고, 마른 고기는 이로 끊지 마라.
남녀관계에 대하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은 7세가 되면, 같은 공간에서 만나지 마라.
여자와 남자가 물건을 주고받을 때는 바로 주고받지 말고 여성이 어떤 장소에 물건을 두면, 나중에 남성이 그것을 집어가라.
여성은 오로지 음식과 의복을 만드는 일만 하라.
여성은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
아내를 내쫓을 이유는 다음 7가지다. (①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②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③ 부정한 행위, ④ 질투, ⑤ 나병·간질 등의 유전병, ⑥ 말이 많은 것, ⑦ 훔치는 것이다.)
철저히 가부장적이며 양반 남성중심주의 시각에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윤리다.
이상적 도덕 사회를 꿈꾸었던 사림(士林)은 말로만 개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 윤리를 실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소학을 완벽히 구사한 도덕적 스승으로 등장한 사람이 조광조다. 그는 언제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꼼짝하지 않고 꼿꼿이 앉아 책을 읽었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으며, 아무리 더운 여름이어도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그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문세족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자연히 보수세력인 훈구세력과 싸워야 했다. 조선 역사가 증명하듯이 개혁세력이 보수 훈구 세력을 이긴 적은 없었다. 보수 세력의 앞잡이인 남곤과 심정 일당은 온갖 루머와 조작으로 조광조를 음해하였다. 지금까지 개혁세력을 밀어주던 중종이 기득권층의 집단 반발에 불안을 느끼고 조광조와 사림(士林) 일파를 숙청하기로 하였다. 조광조는 귀양 가서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사림 세력은 다시 지방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보수세력은 자기 권익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리다. 그들은 결코 우습게 볼 존재가 아니다.
사림은 도덕과 윤리만 바로 세우면, 나라가 개혁될 줄 생각했다. 도덕 이데올로기는 어찌 들으면 매우 훌륭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마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처럼 자신도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강조하며 백성의 어깨에 무거운 짐만 올려놓는 것과 같다. 후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사림, 훈구 세력을 가리지 않고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소학을 권장하였다. 그들은 백성이 얼마나 굶주려 죽어가는지, 얼마나 고통받는지, 얼마나 눈물 흘리는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도덕과 윤리만 강조하였다. 그것이 조선시대 양반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나는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며 가르치는 보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보수주의자들이 교리를 수호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일은 귀한 일이다. 그런데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사람들에게 성경대로 살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백성이 지금 무엇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지, 그들이 무엇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지, 그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사상누각(沙上樓閣)과 다를바 없다. 도덕과 윤리만 강조하여 가르치고 백성을 돌보지 않았던 조선 양반네와 다를 바 하나도 없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수 세력 편에 서서 도덕을 강조한다면, 어찌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힘쓰는 기독교라 할 수 있는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이 정말 개혁을 원했다면, 조선의 건국 이념인 민본(백성이 주인이다.)사상을 깊이 되새겨야 했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일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먼저 백성의 삶을 살폈어야 했다. 백성의 소리, 백성의 아픔, 백성의 애환을 헤아리고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중세 기득권층인 가톨릭의 부패함을 무너뜨리고자 종교개혁자들은 과감히 일어섰다. 그들은 성경을 묵상하고, 깨달은 바 진리를 사회에 적용하려 하였다. 비록 미숙한 점이 있긴 하였지만, 그들은 세상을 개혁하고자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끌어 안았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나는 보수 신학이란 말보다 개혁 신학이란 말을 더 선호한다. 시대의 아픔, 백성의 아픔을 외면한 성경 연구와 영성 추구는 기득권층이 가장 좋아하는 종교인의 모습이다. "교회 안에 숨어서 사회가 어찌 돌아가든 신경 쓰지 말고 너희 영성이나 추구하라!"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기득권층의 말을 듣지 말고 이제 기독교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기독교는 잃어버린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찾아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고, 시민 사회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결코, 보수 기득권층을 보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변질하여서는 안된다. 진리는 텍스트(성경)에서 컨텍스트(세상)로 나와야 힘이 있다.
1.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견소의로고(見笑矣盧古 - 하는 짓이 도리에 어긋나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
‘구질기로고(仇叱其盧古 - 하는 짓이 더럽고 거칠고 음란해 구질스럽다.)
‘패아로고(敗阿盧古 -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망가뜨려 망신스럽다.)
선비들이 말끝마다 로고(盧古 - 어떤 사실을 결단하는 끝말)라 하는 것을 듣고 백성은 풍자적 언어유희를 하였다. 로고(盧古)를 노구(爐口 - 연산군의 주전자)로 바꾸어 연산군을 비웃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2.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 강명관 지음 / 푸른 역사 / 2007년
3.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 / 노대환 지음 / 역사의 아침 / 2007년
4. 옛사람 59인의 공부 산책 / 김건우 지음 / 도원미디어 / 2003년
5.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 김재영 지음 / 삼인 / 19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