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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30. 2022

우리는 지금까지 죽음을 오해했다.

전에 목회할 때에 효자 장로님이 계셨다.

어머니가 치매로 돌아가시기까지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셨는지 모른다.

반면에 동생 셋이 있는데 이들은 불효자로서 어머니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자라면서 단 하루도 홀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린 적이 없었다.

교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주변에서 모두 안타까워하였지만, 남의 집안일이라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권사님이 돌아가신 후 전라도까지 가서 하관 예배를 드렸다.

그날 장로님의 여동생이 관을 붙잡고 대성통곡하였다.

뒤따르던 남동생들도 목이 쉬어라 울부짖었다.

“엄마~~~!”

장례 예식을 집례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오열하였다.

여동생은 급기야 실신하였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불효하더니…

돌아가실 것을 뻔히 알면서,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해 드린 적이 없었기에 통곡하였다.


내가 군에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40대이신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보초 근무를 서는 데 눈물이 솟구쳤다.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고, 교회에서 충성 봉사하시며 건강하셨는데.

죽음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휴가 나와서 작은아버지의 임종 이야기를 들었다.

산동네 작은 집에 세 살면서도 장로로서 교회에 충성하였다.

그날도 교인들과 함께 심방하기로 약속하였다.

전도사도 없던 교회였기에 작은아버지는 심방 설교를 준비하셨다.

심방 대원들이 집에 찾아와 말하였다.

“장로님 심방 가실 시간이에요”

방 안에서 작은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나갈게요.”

심방 대원들은 설교 준비를 하시느라 늦는 줄 생각하고 여유 있게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작은아버지는 나올 기색이 없었다.

심방 대원들은 방문을 두드리다 답이 없자 문을 열었다.

작은아버지는 앉은뱅이 책상에 성경책을 펼쳐 놓고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작은아버지는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윤동주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노래하였다.

처음 그 시를 읽었을 때 “죽어가는 것을 어떻게 사랑하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언젠가 헤어질 것을,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모두 사형수와 같다.

다만 언제 임종할 지 모를 뿐이다.

언젠가 마주하게 될 죽음과 헤어짐을 생각한다면, 단 한 점의 아쉬움도 남지 않도록, 사랑해야 한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미래’와 ‘강림’이라는 용어로 구분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미래는 과거,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 순서를 뜻한다.

반면에 라틴어 adventis에서 유래한 advent(강림)은 미래가 나타나서 현재로 들어와 우리의 미래를 바꿔 놓음을 뜻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막연히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과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다.

물론 그 약속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긴 하지만,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현재적 약속이다.


몰트만은 말하였다.

“그리고 이 최후적인 것에는 우주적인 영광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 세계의 심판,하나님 나라의 성취, 죽은 자의 일반적 부활, 그리고 만물의 새로운 창조가 속해 있었다. 이 종말의 사건들은 역사의 저쪽(미래)으로부터 이쪽(현재)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으로서 이때까지 여기서 활동하고 움직이던 역사는 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고 이해했었다.”(Moltmann, p.13)

기독교 종말론은 시간적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기에 현재적이다.

"종말론은 그것의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어야 할 것이다"(Moltmann, p.16)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소망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미래가 현재 우리의 삶에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생활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에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땅에 살지만, 이미 하늘나라에 사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삶과 동질이다.

죽은 후의 삶은 현세 삶의 비약적인 연속(비연속의 연속)이다”(Taylor, p.58)


키르케고르는 말하였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이라면 인간은 삶을 원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위험을 알게 될 때 인간은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크게 된 경우의 절망이란, 한 번 죽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없는 상태를 뜻한다." (Kierkegaard, p.14-15)

키르케고르는 육체의 죽음보다 더욱 두려운 위험으로 도덕적 죽음을 말하였다.

도덕적 가치를 잃을 바에는 차라리 육체적 죽음을 택하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도덕적 죽음을 넘어서 영적 죽음을 두려워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적 죽음 후의 맞이할 영원한 천국 소망을 가졌기에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에 내포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을 몸에 달고 살아간다. 


윌리엄 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미루면 사람들은 대부분 후회할 거라고 역설했다.

막상 죽음이 찾아오면 대개 뭔가를 고치기에는 너무 늦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먼 미래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과 죽음 너머 영원과 하나님 나라를 현재로 바꾸어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새 생명을 누린다.

따라서 미래를 소망하며 산다는 말은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는 뜻과 동일하다. 

죽음은 곧 현재이고, 현재는 곧 죽음이다.


참고도서

Kierkegaard, Søren, Sygdommen til døden(죽음에 이르는 병), 박환덕 옮김, 범우사, 2002

Moltmann Jurgen, Theologie Der Hoffnung(희망의 신학), 박봉랑, 전경연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77.

Taylor Jeremy, The Rule and Exercises of Holy Dying(거룩한 죽음), 주욱종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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