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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에 돌아가신 은사님이 챙겨주신 나의 노후

촛불회 50주년을 축하하며

by 홍플마

(2025년 6월 30일 작성)


(매우 긴 글입니다.)

<내용 구성>

1. 첫 연금날 떠오른 선생님의 얼굴

2. 선생님과 나의 인연

3. 내 연금은 어떻게 두 배가 되었을까?

4. 선생님이 주신 뜻밖의 봉투 하나

5. 선생님의 짧은 우화 그러나 긴 여운




1. 첫 연금날 떠오른 선생님의 얼굴

몇 달 전, 첫 국민연금을 받았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내가 아무런 일을 안 해도 매달 고정 수입이 생긴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 경우엔 남들보다 더 좋아할 만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 받는 연금이 애초에 받을 뻔했던 금액의 두 배라는 점이었다. 연금 수령 개시 직전 '기수령분 반납'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난 매달 절반만 받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요즘 같은 시대엔, 이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사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반납 기회가 있었으나, 난 한 번도 반납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반납한 후 내가 일찍 죽기라도 하면 그 돈은 그대로 손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였는데 연금 신청 마감일 직전에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의 마음 바꿈 덕분에, 내 노후 계획의 원안에는 없던 새로운 고정 수입이 추가로 생기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일흔 살을 넘어서까지 살 수만 있다면, 이 추가 수입은 내 늘그막의 큰 행운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기수령금을 반납할 생각이 전혀 없던 내가 어쩌다 막판에 마음을 바꿨을까?


이 질문은 34년 전 세상을 떠나신 고등학교 은사님 한 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은사님의 따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얻은 정보 하나 때문에 내가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은사님과의 인연 덕분에, 나는 연금 두 배라는 '뜻밖이자 아주 요긴한 선물'을 받게 된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은사님께서는 이미 48년 전에도 내게 '뜻밖이자 아주 요긴한 선물'을 주신 적이 있다. 정말로 내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점에, 마치 내 상황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갑자기 용돈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연금의 행운도, 그때 받은 용돈과 같은 은사님의 또 다른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 글에서는 은사님에 대한 이런 회상들을 몇 가지 되짚어보며,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마음 깊이 남아 있는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2. 선생님과 나의 인연

은사님의 성함은 최운기 선생님이시다. 최운기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48년 전,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은 '촛불회'라는 봉사 동아리를 통해서였다.

‘촛불회’는 이름 그대로 양초에서 비롯된 봉사 동아리였다. 양초처럼 자신의 몸을 태워 주위의 어둠을 밝히자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당시 화학 과목을 맡고 계셨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파라핀으로 양초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는데, 축제철이 되자 몇몇 학생들이 선생님의 지도 아래 각양각색의 양초를 만들어 판매했다. 이렇게 마련된 수익금은 고아원과 양로원에 기부되었다. 학생들은 추운 겨울, 쌀과 연탄 같은 생필품을 직접 들고 현장을 찾아가 봉사를 실천했다.

이 일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 행사를 계기로, 자발적으로 봉사에 나서고자 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동아리를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촛불회’였다. 이 촛불회에 난 4기 멤버로 참여했고, 그렇게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을 맺어준 촛불회는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촛불회는 반세기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과 존폐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른 끈질긴 생명의 불꽃이었다. 출발은 우리 학교 한 곳에서였지만, 5기부터는 여자고등학교 한 곳도 합류하였고, 졸업생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고등학생(YB)-대학생(OB)-일반인이 함께하는 체제로 발전해 왔다. 초기에는 영아원이나 맹아원 등을 찾아 봉사했고 현재는 복지원 같은 시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선생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이런 촛불회의 반세기를 기념하는 행사가 올 11월에 열린다. 하지만 그 불씨를 처음 지펴주신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함께하지 못하신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1991년, 희귀병인 ‘모야모야병’으로 향년 마흔두 살에 세상을 떠나셨다. 너무 갑작스럽고 이른 이별이었다. 그 슬픔은 선생님과 가족 모두에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은, 병상에 힘없이 누워 계시면서도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시던 모습이다. 더 늦기 전에 장가를 가야 한다며, 나에게 잘 어울릴 만한 아가씨를 소개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며칠만 지나면 퇴원하시고, 꼭 약속을 지키실 줄로만 믿었다. 불치병으로 힘겨워하시는 것도 모른 채, 철없이 소개팅 기대만 했던 내 모습이 지금도 마음 한쪽을 아리게 만든다.

선생님의 별세는 촛불회에도 큰 충격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단순한 지도교사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방향을 제시해 주시던 분이었다. 중심이 사라진 조직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촛불회도 여러 차례 존폐의 기로에 놓였었다.

한때 모교에서는 촛불회가 음성 동아리로 분류되어 퇴출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촛불회가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선생님에 대한 기억과 그 뜻을 묵묵히 이어 주신 분들 덕분이었다. 그분들에 대해서는 아마 또 하나의 긴 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 중에서 촛불회원이 아니면서도 특별한 역할을 해주신 사모님, 이애숙 선생님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사모님은 초등학교 교사로서 바쁘게 일하는 가운데 갓난아이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키우고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상을 감당하셔야 했다. 사모님께 고마운 점은 그 고된 삶 속에서도 촛불회를 잊지 않으시고 가슴에 품어주셨다는 것이다. 해마다 선생님의 기일이면 우리에게 추모의 공간을 내어주시고, 행사 때는 따뜻한 미소로 자리를 함께해 주시거나 조용히 기부를 전해주시기도 하셨다.

사모님의 조용한 응원이 있었기에, 우리는 선생님을 잊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뜻을 함께 지켜올 수 있었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돌이켜보면,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의 뜻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계셨던 듯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선생님의 자리를 따뜻하게 지켜주신 사모님 덕분에, 우리와 선생님과의 인연은 끊기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인연 덕분에 나는 '연금 두 배'라는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3. 내 연금은 어떻게 두 배가 되었을까?

작년 말, 선생님의 넷째 따님 결혼식에 다녀왔다. 선생님의 다섯 자녀 중 마지막 혼사였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사모님께서 “아이들 모두 잘 키워 결혼까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했기에, 이 결혼은 내게도 더 각별하게 다가왔다.

"당신이 없더라도 당신 몫까지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테니, 걱정 말고 좋은 곳으로 편히 가세요"라는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였다. 우리 집도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께서 오 남매를 혼자 키우셨기에, 묵묵히 세월을 견뎌오신 사모님의 마음과 고단함이 더 깊이 전해졌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촛불회 선후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선배님이 국민연금 이야기를 꺼냈다.

'국민연금 회수 기간이 생각보다 짧더라.'

난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집에 돌아와 계산해 보니, 내가 그토록 꺼려했던 ‘기수령금 반납’이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무조건 선택해야 할 방향이었다.

나는 예전에 사학연금으로 전환하며 국민연금을 정산해 일시금으로 수령한 적이 있었고, 그러다가 다시 국민연금 체계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국민연금공단은 기수령금을 반납하면 예전 가입 기간이 복원되어 연금 수령액이 훨씬 늘어난다고 안내해 주었다. 하지만 반납액이 제법 컸기에 한동안 망설이기만 했고, 막상 반납하려고 보니 상당한 이자가 붙어 전체 반납 금액이 원금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었다. 그 억울한 마음에 이후로는 반납 자체를 아예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님의 말대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70세 정도까지만 살아도 본전을 회수할 수 있고, 그 이후부터는 전부 이득이었다. 만약 90세까지 산다면 그 차이는 훨씬 더 커진다. 그렇게 난 기한이 임박한 상황에서 부랴부랴 기수령금을 반납하였다.


선배님의 말을 듣지 못했더라면, 난 절반의 연금만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첫 연금을 받던 날, 마치 누군가가 내 노후를 조용히 챙겨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분이 바로 돌아가신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다. '연금 두 배'라는 행운은 우연처럼 다가왔지만, 그 우연을 이끈 것은 결국 선생님과의 오래된 인연이었다. 물론 직접적 아이디어를 준 선배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4. 선생님이 주신 뜻밖의 봉투 하나

그런데, 선생님께서 내 인생에서 ‘뜻밖의 선물’을 주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1 때였다. 당시 나는 꼭 사보고 싶은 참고서들이 있었으나, 일시적인 집안 형편상 당장 살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께 받은 용돈으로 동아리 회비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서 선배 한 분에게 촛불회를 그만둘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아마도 그 얘기가 선생님께 전해졌던 모양이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 조용히 나를 부르시더니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다. 학비에 보태 쓰라며. 그 용돈 덕분에 나는 참고서를 제때 살 수 있었고, 좋은 성적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용돈이 내게 준 의미는 단순한 성적 향상 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촛불회를 탈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촛불회는 내게 단순한 동아리로서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한 시기를 함께한 절친 같은 존재였고, 삶의 경험을 더 따뜻하면서도 다채롭게 만들어준 귀한 인연이었다. 촛불회 선후배들은 봉사라는 이념을 넘어, 인생을 함께 즐기며 함께 늙어가는 동반자들이다. 선배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후배들을 챙겨주고 후배들은 예를 갖춰 선배를 대접해 주며, 그런 가운데서도 흉허물 없이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 만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만나 밤새워 술 한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선생님께서 왜 나를 챙겨주셨을까?

나는 수많은 제자 중의 하나였고, 특별히 더 예뻐할 이유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선생님은 남을 돕는 일을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실천해 오신 분이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 사정을 전해 들으시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당신의 월급 봉투를 여신 것이다. 선생님의 성품을 한 가지 더 엿볼 수 있는 점은, 선생님은 요란하게 드러나는 외부 봉사에 앞서, 조용히 내부의 어려움부터 살피셨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우리가 봉사를 대함에 있어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 말고도 또 다른 촛불회원도 같은 도움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재벌이 아닌 이상, 당신의 용돈만으로 여러 제자들을 돕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께서 남몰래 제자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사모님은 알고 계셨을까?'

우리는 잘 안다. 빠듯한 예산으로 돌아가는 가정에서 남편이 누군가에게 돈을 베풀려면, 가정의 재정을 함께 꾸려가는 아내의 이해와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선생님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내게 주신 그 용돈 뒤에는, 선생님의 뜻을 존중하는 사모님의 따뜻한 마음도 함께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렇기에 선생님이 떠나신 뒤에도, 사모님은 그 마음을 조용히 이어오신 듯하다. 선생님의 정신이 촛불회 안에서 계속 살아 있도록 애써주신 모습이 그 증거다.


고1 때 받았던 용돈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나는 선생님과 사모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기억이 내게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또 있다.

앞서 국민연금 기수령금 반납을 결정한 시기가 절묘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고1 때의 그 용돈도 그랬다. 금액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돈이 정말 절묘한 순간에 주어졌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치 선생님께서 그 순간의 내 사정을 모두 알고 계셨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절묘한 순간들이었다. 특히 이번 연금 행운을 통해, 오래전 돌아가신 선생님이 내 인생을 여전히 지켜보고 계시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이 기억들을 괜히 더 오래, 더 따뜻하게 간직하고 싶어진다.


5. 선생님의 짧은 우화 그러나 긴 여운

지금까지는 선생님께서 내게 주신 경제적 도움을 중심으로 회상해 보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에 더 깊은 영향을 준 것은 그분께서 남기신 정신적인 가르침이었다.

고1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짧은 우화가 하나 있다.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견학하게 되었다.
먼저 지옥에 갔더니, 사람들은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도 굶주림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유를 살펴보니, 그들의 팔에는 아주 긴 젓가락들이 묶여 있었다. 음식을 집을 수는 있지만, 그 긴 젓가락으로는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뺏길까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했고, 결국 어느 누구도 음식을 먹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었다.
이어서 천국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곳 사람들의 팔에도 똑같은 젓가락이 묶여 있었고, 음식 역시 지옥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밝고 건강해 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로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이 우화를 그저 ‘남을 도우며 살자’는 식의 단순한 교훈 정도로 받아들였고, 깊은 생각 없이 흘려들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됐다. 그 우화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내 삶의 중요한 방향을 이끄는 씨앗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씨앗은,어머니와 아내의 삶을 지켜보며 조금씩 자라나 내 인생의 하나의 철학이자 행복론으로 정립되었다.

잠시 내 행복론에 대해서 얘기해보려한다.
나는 종종 어머니와 아내한테 궁금한 것이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특별한 취미도, 모임도 없고,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심도 없는데 무엇으로 삶의 재미를 느낄까? 그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들이 느끼는 행복의 원천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내가 행복해하면, 그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
이들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하는 일은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들의 모든 관심사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 그리고 내가 몰두하는 일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데에 모아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어머니와 아내의 삶의 방식은 바로,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천국의 사람들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는 것을. 맛있는 음식을 자신의 입에 넣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넣어주는 삶. 자신이 아닌, 곁에 있는 사람을 먼저 행복하게 해주는 삶. 그것이 바로 내가 평생에 걸쳐 스스로 정립한 행복론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 핵심은 사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들었던 짧은 우화 안에 모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의미를, 오래도록 잠재의식 속에만 품고 있다가 늦게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 행복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또 스스로를 직접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면, 그 따뜻함은 세상으로 더 쉽게 번져나갈 수 있다.

실제로 선생님댁도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 천국의 사람들처럼 살아가셨던 선생님.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도, 사모님께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결과, 두 분은 지역 사회에서 모범 고부관계 사례로 표창까지 받으셨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일찍이, 하나의 가정이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계셨고, 그로부터 사회 전체의 행복을 고민하고 실천하신 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의 부재가, 유난히 아쉽고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선생님께서 더 오래 살아계셨더라면, 선생님의 그 선한 영향력이 전파되고 또 전파되어 이 사회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행복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 글을 마무리지으며 지금의 내 삶을 돌아보면, 선생님께서 전하려했던 삶의 방향을 아주 조금이지만 나도 모르게 따라 살아온 것같다는 생각이든다. 그런 선생님을 학창시절에 만날 수 있었던 건, 분명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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