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링, 띠링'
전방 100미터에 100km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경고음이 울린다. 나는 능숙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숫자를 100으로 맞춘다. 사실 105킬로까지만 줄여도, 추후에 고지서가 날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종의 강박과도 같이 정확한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그 엄격한 감시의 눈을 통과한다.
나는 안다. 카메라가 없다면 언제까지고 130km 이상으로 달렸을 것이라는 걸.
재미있는 건, 그런 나의 속도를 가볍게 추월하는 차량 뒤에서 내가 혀를 찬다는 사실이다. 카메라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뭐가 그리 급해서 분노의 질주처럼 저렇게 달리느냐고.
그저 ‘법'을 지키고 있다는 우월감에서였을까. 사실은 그 구간 전체가 100km 제한속도일 텐데, 그저 카메라 앞에서만 속도를 줄여 법망의 테두리를 통과해 벌금을 피한다는 내가 참 얄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얄팍함은 정해진, 규제하지 않는 어떤 선이 없다면 나는 언제든 범죄를 저지를 것만 같다는 공포로 다가왔다.
타인에 대한 공포도 그런 식으로 다가왔다. 내가 의식하지 않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선을 넘어, 타인을 불쾌하게 했을 때에 대한 자괴감은 상당히 치명적이다. 게다가 인간관계서 감시 카메라 따위는 없다. 배려가 무례가 되었다는, 추후의 ‘고지서’를 받았을 때, 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감은 바닥을 친다. 그리고 그나마 쌓아 올린 관계마저 허물어져, 다신 다가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원만한 관계가 되면 자연스럽게 허용되는 질문이 많아지는 법이다. 그때, 질문 자체가 폭력이 되는 경우가 그렇다. 외모에 대한 것이며, 정치적 견해, 취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다. 이 단계에서 나도, 상대도 본의 아니게 선을 넘는 경우, 더 이상의 관계를 유지할 이유는 없어진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나 모임에 속해 불가피하게 지속적으로 보는 관계가 되었다면, 그 암금은 더욱 나를 잠식하게 된다. 그럴 때면 선에 대한 예민함은 극에 도달한다. 감정에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일까? 죽도록 미운 사람에게 더욱 조심하게 되며, 원만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실수하게 된다. 편한 사람에게는 의식하는 선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며, 그저 그 관계 안에서 내가 우선시 되기 때문이다.
친구가 없다, 라는 것은 보통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일정 부분 맞을 수도)라는 이유를 들곤 하는데, 나는 앞서 말한 관계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친구라는 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말하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하겠다. 나를 포함해, ‘개인'이라는 간격의 폭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거나, 감시 카메라처럼 경고음 등으로 알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