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되지 않는 맛이 있다. 그것은 사소한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끝내 양보하지 못하는 ‘미각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내 경우, 그 존엄은 하필 라면 앞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세상은 라면에 대해 너무도 명확한 합의를 이뤄 놓았다. 펄펄 끓는 국물, 탱탱하게 살아 있는 면발, 그 위에 파와 계란이 떠다니고, 김치 한 점을 곁들여 후루룩 들이켜야 비로소 ‘제대로 먹었다’는 성취감에 도달하는 방식. 일종의 안도감이랄까. 그러나 나는 남들이 완성시킨 그 장면 앞에서 언제나 미묘한 배신감을 느낀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면은 맛있다. 분명히 그렇다. 단, 내가 먹는 라면만 그렇다.어렸을 때부터 나는 뜨거운 것을 견디지 못했다. 불타는 국물은 언제나 내 입 천장을 헐게 했고, 그렇게 도중에 포기한 라면이 몇 박스나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신라면 한 봉지 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굳이 넣는다면 떡 정도. 그것을 끓여 반쯤 덜어내고, 후, 후 불어가며 젓가락으로 건져 올린다. 아직 국물에 완전히 절여지지 않은 면. 조금은 덜 익고, 덜 젖고, 아직 ‘미완'을 유지한 상태의 면을 ‘후~’식혀 먹는다.
서너 젓가락쯤 지나면 면은 서로 달라붙기 시작하고, 국물은 더 이상 스며들지 않으며, 라면은 어느새 라면이기를 포기하고 떡의 형태로 변모한다. 이 불어터진 상태, 모두가 고개를 젓는 그 순간에 나는 가장 깊은 만족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라면의 얼굴이다.
그러나 이 취향을 세상에 고백하는 순간, 언제나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아니, 무슨 소리야? 왜 라면을 그렇게 먹어?”
혹은,
“너 때문에 내가 먹는 라면도 맛없어졌어.”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라면은 국물의 음식인데, 왜 면만 건져 맛을 망치느냐. 면은 살아 있을 때 먹어야지, 왜 일부러 죽여 놓고 음미하느냐. 그들의 질책 앞에서 나는 언제나 침묵한다. 마치 내가 미각의 공동체를 배반한 일종의 이단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 취향은 공개하지 않기로.남들과 라면을 먹지 않기로.
나는 나만의 라면을 끓인다. 나만의 타이밍으로 건져 올리고, 나만의 온도로 식히며, 나만의 속도로 씹는다. 타협되지 않아도 좋다. 이해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적어도, 내 그릇 앞에서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