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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자 Feb 11. 2020

04 쓰는 이유



"나오토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생각해?"

"응. 물론이지."

"그곳에서 나오토는 그대로 나오토야?"

"응."

"그 세계에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같이 있어? 그러니까 나오토가 죽고 난 후에 나오토가 있게 되는 그 세계에는 살아있는 나도 있는 거야?"

"내가 느끼는 네가 있는 거지."


점심으로 뭘 먹었냐는 질문에 짜장면을 먹었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했던 15년 전의 이 대화는 홀로 모래밭에 주저앉아 위태로운 모래성을 쌓아 올리고 있던 나의 마음에 결정적인 확신을 심었다. 그래,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야. 존재의 상태가 번갈아 가며 모양을 달리할 뿐이야. 마치 수증기가 물이 되고, 물이 얼음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영원히 반복되는 거야.


나오토는 테이블 위의 안주를 무심하게 주워 먹으며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나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다.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특별하지도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한 그의 태도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생긴 모양만큼이나 다양한 성격과 취향, 관점과 입장 따위를 갖고 있다. 그리고 타인을 파악하기 위해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궁금해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후세계관에 대해서는 서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음식,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어느 정당,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서로 묻고 답하면서도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혹은 "사람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 것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명확한 종교인은 제외한다 치자. 누군가가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 온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반갑게 대화에 응할 것인가?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자'는 뜻을 밝힐 것인가? '똥 싸는 소리 하지 말고 죽으면 끝이니까 현생에나 집중하라'고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인가? 죽음에 대한 대화가 영 마뜩잖다면 주제 자체보다 주제를 다루는 태도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닌가? 숨이 막혀 오는 진지한 태도로 피어오를 가능성이 있는 흥미조차도 질식시켜 버린다든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간 만사 공수래공수거 세상 초탈한 태도로 읊조리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말들도 그리 효과적인 도구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나 썸 타는 이성과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듯 흥미롭게 재미있게 삶과 죽음, 세계의 모양, 우주의 근원, 차원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걸까. 그것이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이유다. 철학자 셸리 케이건이 논리적인 언어로 삶과 죽음을 차곡차곡 설명했다면 나는 썰을 푼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하고 있다. 최근 연달아 유체이탈을 경험하면서 내가 쌓아 올린 모래성은 콘크리트성으로 진화 중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진지해지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써 내려가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나도 쓰면서 질식할 것 같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 또한 나의 몫 아니겠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술술 쓰겠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번호까지 달아가며 하는 걸까 하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이 연재의 목적을 04번에 와서야 미리 밝혀둔다. 시작했으니 끝을 보겠다. 끝이 어디쯤일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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