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베리> 리뷰
지금이야 스마트폰하면 갤럭시 vs. 아이폰이지만 과거에 블랙베리라는 기기가 있었음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 브랜드가 전성기를 누리던 뉴밀레니엄 시기, 저는 외국에 살며 노키아폰을 쓰고 있었는데요주변에 블랙베리를 쓰던 어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블랙베리 폰은 언제 어떻게 주류가 되었다가 어째서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일까요? 그 이야기를 너무도 재밌게 영화로 만든 작품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맷 존슨의 2023년 캐나다 영화,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는 120분짜리 테크 활극, <블랙베리>입니다.
1990년대 캐나다의 워터루. RIM의 공동창업자인 마이크와 더그가 부랴부랴 미팅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짐이라는 사람인데, 짐은 첫 등장부터 태도가 영 좋지 않네요. 무례하고 성격 급한데다, RIM의 발표를 귀담아 듣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짐은 RIM의 아이디어인 ‘이메일이 되는 휴대전화’에 대해 한 가지 좋은 충고를 해주긴 합니다.
“포켓링크라니, 제발 그 이름부터 바꿔요.”
마이크와 더그는 쓴 맛을 입에 가득 머금은채 사무실로 돌아갑니다. ‘이름을 바꾸긴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욕심이 지나쳤던 짐은 자신의 꼼수를 상사에게 걸리는 바람에 회사에서 잘리고 말았습니다. 잘난척과 으시대기가 주무기였던 그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요? 그런데 사무실을 정리하는 그의 눈에 한 가지 자료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낮에 두 괴짜가 놓고간 것입니다. 이메일이 되는 휴대전화라… 그는 마이크와 더그를 다시 만나보기로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세 사람. 그런데 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충격적입니다. 내가 돈을 투자할테니 지분과 CEO 자리를 주시오. 제품개발에는 자신이 있지만 영업과 경영에는 크게 재주가 없던 마이크는 이 제안을 수락하기로 합니다. 단, 짐이 말한 것보다는 낮은 지분율과, 자신과 공동대표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비록 철부지 애들 같지만 개발 능력은 뛰어난 RIM의 개발진, 그리고 비록 싸가지는 없지만 사업수완 하나는 뛰어난 한 남자. 두 팀의 시너지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짐은 곧바로 대형 통신사와 미팅을 잡고 개발팀에게 프로토타입을 만들라고 시키지요. 원래 모든 일은 마감이 해내는 걸까요? 개발팀은 고작 하루만에 어찌저찌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두 공동대표는 마침내 통신사로부터 계약을 따내게 되지요. ‘이메일이 되는 휴대전화’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2000년대 들어 이 회사, RIM은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골방 같았던 사무실은 으리으리한 건물이 되었고, 위태로웠던 두 공동대표는 이제 비서를 거느린 거물 CEO가 되었죠. 블랙베리폰은 날개 달린 듯 팔려나고고 말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옵니다. 경쟁사인 ‘팜’에서 블랙베리를 적대적 인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막으려면 주가를 올려야 한다, 그러려면 폰을 엄청 팔면 된다…가 짐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마이크의 입장은 다릅니다. 현재 인프라가 견딜 수 있는 건 50만대까지 인데 이미 그 임계점까지 왔다… 즉 기계를 더 팔면 블랙베리는 먹통이 될 거다…
자, 적대적 합병인수라는 대형위기를 눈앞에 둔 블랙베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린 괴짜 사업가와 괴짜 개발자는 이 문제를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영화 <블랙베리>입니다.
먼저 내러티브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제 작은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말하건데, 전기영화의 내러티브란 언제나 기본 이상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흥미진진한 실화가 아니었다면 영화화하지 않았을테니 말입니다. <블랙베리> 역시 역사를 풍미했던 기업의 흥망성쇠를 녹진한 드라마에 녹여내어 120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웰메이드 전기영화가 되었습니다. 특히 팜, 버라이즌, 애플 같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기업들이 계속 등장하니 ‘밀레니얼 모바일 테크 역사의 이해’라는 아주 재밌는 수업을 듣는 기분까지 들고 말이죠.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를 극화해서 촬영하고 편집한 솜씨가 아주 일품입니다. 맷 존슨은 <블랙베리>를 좀 더 재밌는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캐릭터물로 승화시켰는데요, 주인공은 물론 조연까지,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게 강한 캐릭터성이 부여되어 이야기의 재미가 몇 배는 커졌다는 느낌입니다. 또 각 시퀀스가 갖는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도 매우 안전하고(다시 말해 노련하고) 베테랑의 손맛이 그대로 느껴지는군요.
과연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와 연출을 해낸 맷 존슨은 누굴까요? 바로 여러분이 영화에서 보신 극중 더그 역할, 그가 맷 존슨 감독입니다. 존슨은 이 작품에서 연출, 공동각본, 조연까지 모두 해내며 그야말로 존슨식 코미디 드라마를 제대로 구현했습니다. 세상에 재주 많은 예술가가 가득했던 건 진작에 알았지만, 존슨 같은 멀티 탤런트는 또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요. 그가 연출한 다른 영화들, <아폴로 프로젝트(2016)>, <맷과 마라(2024)> 같은 작품도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칭찬을 실컷 늘어놨느니 아쉬운 점에 대해 얘기할 차례겠죠? 근데… 없습니다. <블랙베리>는 적어도 제 시선에서는 단점으로 꼽을 게 없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영화가 의도대로 나왔고, 충분히 웃기고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니 테크 기업 종사자, 스타트업 경영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 활기찬 드라마를 즐기시길 적극 권장합니다.
영화 <블랙베리>를 보고 나서 하기 좋은 일중 하나는, 그 회사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를 검색해보는 일입니다. 스마트폰 사업이 끝나버렸는데 이 회사는 왜 여전히 존속하는 걸까요? 그것도 시가총액 2조원(‘26.02.04 기준 USD 2B)에 달하는 규모로 말입니다.
찾아보니 블랙베리를 만들던 RIM사는 스마트폰 사업 중단 이후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분야를 찾아 피벗팅했다고 합니다. 바로 네트워크와 보안이지요. 그래서 네트워크 연결 상태에서 가장 보안이 중요한 디바이스 중 하나인 자동차 시장으로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RIM은 2010년 하만으로부터 QNX를 인수합니다. 바로 자동차 OS인데요, QNX는 지금 BMW, 벤츠, 현대차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가 모두 쓰는 제품으로 무려 2억 대 이상의 차량에 적용되어 있는 초특급 제품이라고 합니다. QNX가 견인하는 블랙베리(2010년대에 사명을 RIM에서 블랙베리로 변경)의 연매출은 우리 돈으로 7천억원에 이른다고 하고요.
결국 영화 <블랙베리>가 다루는 것은 사실 한 기업의 흥망성쇠라기 보다, 차량용 솔루션 개발사인 블랙베리의 시즌 1을 다룬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복기해보면 영화가 더 재밌습니다. 저를 울고 웃게 만든 그 녹진한 드라마가, 이 끝나지 않는 여정의 고작 챕터 1이었다는 게 말입니다. 사이먼 시넥이 얘기한 ‘인피니트 게임’이라는 개념이 생각나는 순간이네요. 뭇 기업활동이란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고, 계속해서 새로운 경쟁이 일어나고 위아래가 뒤바뀌고 혁신과 실패와 재도전이 반복되는… 무한 게임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지금 넘어졌다고요? 한때 스마트폰 점유율 40%를 찍었다가 0%로 추락한 한 기업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그 회사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지켜보십시오. 인피니트 게임에서 중요한 건 일희일비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무한반복되는 사이클임을 깨닫고 그저 ‘계속 해 나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요새 마음이 많이 위축돼서 힘이 안난다고요? 그럼 한편의 영화로 마음을 환기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시죠. 제목은 <블랙베리>, 제가 이번 설 연휴에 가장 강추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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