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메이드 K-퍼즐 스릴러
넷플릭스 신작 드라마를 보고 왔습니다. 신혜선의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벌써부터 호평이 가득한 작품이기도 한데요. 긴 말 않고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일찍이 지상파에서 <신돈(2005)>과 <개와 늑대의 시간(2007)>을 선보였고 2020년대 들어 넷플릭스에서 <인간수업(2020>, <마이네임(2021)>, <종말의 바보(2024)>를 연출한 베테랑 김진민PD의 화제작,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웰메이드 8부작 스릴러 <레이디 두아>입니다.
밤 늦은 청담동 명품거리. 해가 뜨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거리는 오픈런 대기자들로 가득합니다. 오늘은 또 어떤 제품들을 손에 넣기 위해 이렇게 텐트를 치고 옷을 껴입고 밤을 지새고 있는 걸까요.
아휴, 담배나 한대 피우자.
기다리다 지친 다혜(배우 윤가이)가 길바닥에 풀썩 주저 앉습니다. 그리곤 보게 되죠. 발밑 하수구 바닥에 놓인 싸늘하게 식은 여성의 시신을 말입니다.
꺄악!
다혜의 비명이, 앞으로 이어질 긴 사건의 서막을 알리듯이 울려 퍼집니다.
경찰청의 강수대가 사건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담당 형사인 박무경 팀장(이준혁)은 곧 죽은 사람이 영국제 명품 브랜드 '부두아'의 한국 지사장 사라킴이라는 것을 알게 돼죠. 패션계의 잘 나가는 스타가 왜 이런 꼴을 당했을까?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을 만나봐야겠습니다. 무경은 곧 한 사람을 소환합니다. 고급 브랜드 녹스의 대표이자, 사라킴의 최측근이었다는 인물 정여진(박보경)이 그 주인공입니다.
여진은 사라킴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들려줍니다. 사교계에서 이미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고, 우연히 만나게 됐고, 급속도로 친해졌고 결국 사라킴의 '부두아'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얘기까지 말입니다.
그 사라킴이 죽었다는 말에 여진은 슬픔을 감추지 못합니다. 무경은 그런 여진과 함께 사라킴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죠. 여진은 시신을 보고 넋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무경이 밖으로 나가자 여진은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합니다. 아무래도 여진에게 사라킴의 존재는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경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여진의 진술과 태도에 석연치 않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머릿속이 복잡해진 무경은 기록을 다시 훑어보기로 합니다. 그러다가 CCTV를 열었습니다. 시신 안치소 혼자 남아 오열하던 여진의 모습이 화면에 떴습니다. 그런데 웬걸, 입으로는 우는 소리를 내면서 정작 여진은 딴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무경은 직감합니다. 사라킴의 죽음에는 앞으로 한참을 파헤쳐야 할 미스터리가 켜켜이 쌓여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스페인의 감독이자 스릴러의 대가 오리올 파울로는 2017년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를 통해 무려 600%의 수익률을 올린 바 있습니다. 저도 이 작품을 감상했는데요,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숨막히는 긴장과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수작이었습니다.
이야기 자체도 재밌지만, <인비저블 게스트>는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구조화 한 방식이 영리한 작품입니다. 먼저 '현재'라는 타임라인에서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남자 주인공과 그에 의해 고용된 승률 100%의 여성 변호사가 독대를 하고 있죠. 어떤 액션도 카메라 동선도 없이, 두 인물은 마주 앉은 채 이야기만 합니다.
한편 남자의 증언에 따라 여러 장면들이 플래시백 되는데요, 이렇게 메인 타임라인에서는 두 인물이 정적으로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도, 유연하기 이를 데 없는 플래시백들이 퍼즐조각처럼 모여 점차 그림이 완성되는 이 장르를 어떤 사람들은 '퍼즐 스릴러'라고도 부르더군요.
오늘 소개한 <레이디 두아>는 이 퍼즐 스릴러의 형태를 잘 활용한 웰메이드 스릴러입니다. 사건을 추적하는 무경은 에피소드 별로 어떤 사람을 통해 사라킴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요, 이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현재와 사건이 마구 발생하는 과거가 교차되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리드믹한 다이나믹 안에 놓여지게 됩니다.
또 베테랑인 김진민 감독은 '현재'에서 증언이 시작되는 플래시백 순간에 늘 긴장 가득한 음악을 깔아 몰입을 극대화 시켰습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플래시백들에 조금도 거부감 없이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던 이유입니다.
명품 브랜드가 주요 소재로 쓰인 작품인 만큼 화려한 볼거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급스러운 부두아의 플래그십 스토어, 핫하디 핫한 론칭 파티, 삼월 백화점의 VIP 쇼핑 라운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 해서웨이 패션쇼를 능가하는 신혜선의 코스플레이까지... 정말이지 미술도 끝내주는 <레이디 두아>입니다.
정교한 연출과 화려한 볼거리, 그리고 관객을 압도하는 신혜선의 연기까지 한데 모였음에도 <레이디 두아>에는 아쉬운 점이 분명 있습니다. 바로 리얼리티가 살짝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나무위키에도 '부족한 극의 개연성'이란 언급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족보도 없는 가짜 명품이 백화점 입점을 하는가, 어떻게 주민등록이 제대로 되지 않은 두 명이 서로를 만났냐.. 같은 점들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문제들이 전혀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레이디 두아>가 하려고 계획한 것들이 충분히 잘 전달된데다, 디테일한 설정들은 '그렇다 치고' 보는 요새 넷플릭스 트렌드를 고려하면 오히려 꽤 신경 쓴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어서 말입니다.
끝으로 결말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부두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김미정이 되고, 그럼으로서 10년 복역을 받는 사라킴의 선택에 대해 말입니다. 사실 이 엔딩이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저 재밌는 작품이었다만 굳이 리뷰를 쓰지는 않았을 텐데, 이 엔딩으로 인해 <레이디 두아>는 화제의 시리즈를 넘어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으로 그 영역을 확대했으니까요.
<레이디 두아>의 8개 에피소드를 모두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욕망'일 겁니다. 사라킴이라는 거대한 욕망의 원천이 각기 다른 욕망들을 끌어당기고, 그 안에서 갈등과 우정이 생겨 납니다. 그리고 결국 욕망으로 인해 파멸하고, 욕망으로 인해 간신히 지켜내는 무언가가 남는 것이죠.
이 욕망 이야기의 오래된 다른 버전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5년에 출간한 이 고전 소설에서 주인공 개츠비는 인생의 사랑 데이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데요. 말도 안되게 호화스런 저택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파티를 열며 그는 어떻게든 데이지를 자신의 근처에 두려고 합니다.
욕망으로 가득한 개츠비와 상반되게 정작 데이지는 공허함으로 가득한 여성인데요, 데이지의 정신과 마음이 공허하거나 말거나 개츠비의 구애는 계속되고, 결국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환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게 됩니다.
'부두아'를 향한 사라킴의 마음과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라는 결국 자신의 안위보다 부두아라는 환상을 지키길 선택하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말합니다.
"형사님은 사건을 해결해 승진을 했고, 사라킴은 부두아를 지켰고, 사라킴이 되고 싶던 김미정은 그 소원을 이뤘고...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사기예요?"
저는 사라킴의 말을 반박할 꼭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이야기에 강하게 끌렸고, 극본을 쓴 추송연님에게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냈고, 앞으로 누군가 물으면 이 작품을 이렇게 소개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레이디 두아? 그건 위대한 개츠비보다 더 위대한, 어떤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레이디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