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에 의해 상처받지만, 결국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 버지니아 울프
가끔은 마음이 바다처럼 잔잔하다가도, 예고 없이 큰 파도가 몰려올 때가 있다. 감정이 갑자기 울컥 치솟는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데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오는 순간들이 있다. 누구나 이런 격동적인 감정의 순간들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인관계 뿐만 아니라 일상다반사로 감정이 민감하다 못해 극단적 또는 양가적이 되고, 감정의 기복이 극단적으로 널뛰듯 한다는 데에 있다.
문학작품은 일상에서 말로는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이러한 감정들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면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소설 『연인(L’Amant, 1984)』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동시에 그를 증오했다. 그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이미 그가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문장은 사랑의 양가적 감정, 즉 강렬한 애착과 동시에 상대로부터 버림받을 두려움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다. 격렬하지만 불안정한 사랑, 끊임없는 자기 분열적인 양가감정의 표현이 돋보인다.
정체성 혼란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를 겪는 인물의 심리를 잘 묘사한 작품들도 있다. 정체성 혼란과 고립감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작품 중에서 대표적으로 한강 작가는 소설 『소년이 온다. 2014』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라고 표현한다. 또 임상적으로는 주로 우울증과 관련해서 읽히는 실비아 플라스의 반(半)자전적 소설 『벨 자(The Bell Jar). 1963』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유리 종 속에 갇힌 채 숨이 막혀가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묘사들은 읽는 이의 문학적 감성을 민감하게 터치한다.
문학작품은 인간 존재의 불안정함과 감정의 극단을 이처럼 상징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잘 표현한다. 그러나 강렬한 감정 기복, 버림받을 두려움, 불안정한 정체성, 공허감, 격렬한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는 인간관계를 다룬 문학 작품의 이러한 내용은, 문학적 감성 또는 감정적 민감성과는 별개로 현실적인인 의학적 진단의 기준에서 봤을 때, '경계성 인격장애'의 특징과 매우 닮아 있다.
참고로 '경계(境界, Borderline)'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를 뜻한다. 우리 말 ‘경계’라는 단어 자체가 어느 쪽 경계에 끼어 있음이라는 뜻 때문에 중간 상태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경계성'을 흔히 '정신증과 신경증 사이의 경계적 특성'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경계성'을 “중간 단계 환자”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에, 정서·사고·대인관계·자기정체성이 불안정하고, 극단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특정 성격장애 유형을 가리키는 고유명칭으로 정착했다. 즉, “경계성”이라는 용어는 역사적 문자적 의미의 잔재일 뿐, 현대 임상에서는 진단적 범주명이지 결코 “어중간하다/애매하다”는 뜻이 아니다.
'장애(障碍 Disorder)'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 기관이 본래의 역할에 맞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장애로 나타나는 기능이상(dysfunctioning)은 주로 세 가지의 다요인적 원인, 즉 ①신체 손상(신체나 신체 부위 수준에서의 기능 이상), ②활동의 제한(신체적 정신적 개인 수준에서의 기능 이상), ③참여의 제약(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정신적 심리적 개인 수준에서의 기능 이상)과 관련이 있다(WHO. 2002).
'경계성 인격장애(BPD)'의 특징은 감정 조절의 어려움(극심한 감정기복), 충동성, 정체성의 불안정(정체성 혼란), 불안정한 대인관계가 특징이다. 이때문에 일상기능과 대인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주요 증상은, 버려짐에 대한 극심한 공포, 불안정한 대인관계(이상화↔폄하), 정체성 혼란, 충동적·자해적 행동, 정서적 불안정(극심한 감정기복), 만성적 공허감, 부적절한 분노 또는 정서 소실(해리, 즉 현실과 환상의 혼동),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의 행동양상이 일상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는 공격적이진 않으며, 극단적인 행동은 일부 위기 상황에서만 나타난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단순한 성격 특성이 아니다. 기능 장애를 동반할 수 있는 정신건강 상태다. 정신적 기능장애로 나타나는 증상때문에 삶과 관계를 심각히 해칠 수 있다. 따라서 경계성 인격장애는 치료와 지원이 필요한 정신건강 상태다. 과장된 인식은 환자의 사회적 배제를 야기할 뿐이다. 다만 경계성 인격장애자 중에서 대인관계에서 특별히 경계해야할 사람은 인성이 나쁜 사람이다. 그 중에서도 반사회 성향의 나르시스트 또는 소시오패스의 특성이 겹쳐 보이는 사람은 최악이다.
우리나라의 경계성 인격장애의 유병률(2019년)은 인구 1만명당 약 1.06명(약 0.01%)으로 2010년 이후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만 여성이 남성보다 진단받는 비율이 점점 커지는 추세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관찰되었고, 여성 유병률(1.32명/1만명)은 약간 증가하였다. 남성 유병률(0.80명/1만명)은 큰 변화가 없었다(Yonsei Medical Journal, 2023).
유병률 0.01%는 1만명 중의 1명으로 '거의 없다'라고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계가 진단된 환자만 반영한다는 점에서 ‘숨은 환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주변에 또는 가까운 사람들 중에 실제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가 있음에도 진단되지 못하거나 숨겨진 환자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때문에 주변인이 성격장애로 의심하거나 도움을 권하는 데 소극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경계성 인격장애의 유병률은 남녀가 크게 차이가 없다. 남성보다 여성의 유병률이 다소 많은 것은 성격장애의 진단 접근성·성 역할 기대·표현 방식 차이 때문에 여성 환자가 더 많이 진단되었을 뿐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한다. “누군가 나를 떠날까 봐, 내가 버려질까 봐 너무 불안하다.”, “순간순간 기분이 너무 달라진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마음이 텅 빈 것 같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세상과 사람을 느낀다. 남들에 비해 감정의 진폭이 크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갈등과 긴장을 경험한다. 결국 경계성 인격장애는 극단적인 감정의 파도를 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다시 표현하자면 마음이 극단적으로 예민하고 감정적으로 정신이 아픈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예전에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두고 “치료가 어렵다”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경계성 인격장애는 더 이상 ‘끝없는 고통’의 이름이 아니다. 수많은 연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환자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안정된 삶을 되찾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담으로 솔직히 대인관계에서 인격장애의 문제가 있음에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가능한 한 엮이지 않는게 최선책이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물론 타인과 감정적으로 애매모호하거나 복잡하게 엮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내 단순한 성격 탓도 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등 인간관계로 깊이 엮여져 있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 무엇보다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치료를 위한 지원과 지지가 요구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갈등과 긴장의 당사자인 본인이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전문가를 찾아가 전문적인 치료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전문가의 치료와 관련하여, 최근 심리상담 전문가의 가면을 쓴 이단•사이비•상업작가•종교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신적 심리적으로 허약하여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주요 타켓으로 하고 있다. 정확한 진단이 필요한 정신적 심리적 장애는 일시적인 감정적 통찰이나 느낌 그리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거나 또 스스로 듣기 원하는 바를 전문가의 입을 통한 감정이입식의 상담만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 하물며 사이비는 오죽하겠는가? 사이비의 목적은 뻔하다. 의사가 쥐고 있는 칼과 도적이 쥐고 있는 칼은 의도와 목적이 전혀 다를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속되게 일러 '돌팔이'라고 부른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다.
사람의 정신적 혹은 심리적 문제 또는 장애의 원인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에 각양각생이다. 심지어 다요인적 원인이 안팎으로 얽히고설켜 복합적인 경우도 많다. 다시 말해 문제의 치료에 대한 해법이 천편일률적이거나 획일적인 모범정답이 없다는 말이 되겠다. 스스로 정신적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사회적으로 자타 공인된 정신과 전문의 또는 자타 공인된 심리치료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 자타공인된 전문가란 대학에서 6년이상의 전공 교육을 수료하고 국가공인 전문자격증을 취득한 후 공인된 전문감독 아래에서 최소 5년 이상 수련과정을 통해 임상경험을 축적한 사람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거나 이예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추세에 의하면, 경계성 인격장애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에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치료에 임할 때 경계성 인격장애는 ‘끝없는 문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문제에서 ‘회복 가능한 상태’로 나아가는 여정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주변의 도움 및 전문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약함의 인정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을 향한 용기 있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을 절망케 만드는 그것. 그 절망 속에 마지막 희망이 숨겨져 있다(니체)." (2025.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