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투스여! 너마저?"
인용구는 셰익스피어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시저의 참담한 심정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대사다. 배신은 오직 당해 본 사람만이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얼마나 처참하며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를 안다. 각설하고 사람 사이의 신뢰란 마치 유리잔과 같다.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쌓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힘들게 쌓은 신뢰일지라도 일단 신뢰에 금이 가면 이전과 같은 투명함을 회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반드시 또 배신한다"는 경고 섞인 조언을 듣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남긴 기록과 현대 과학이 밝혀낸 연구 관찰 데이터는 우리에게 차가운 경고를 보낸다. 배신은 단순히 어쩌다 저지른 일회성 실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생존 전략이자 뇌의 습관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배신의 굴레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인물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자 군사령관 알키비아데스였다. 그는 시켈리아 정복 원정 중에 정적에 의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좌절된 상황에 봉착하자, 모국인 아테네를 배신하고 적국 스파르타에 국가기밀을 넘기고 스파르타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스파르타마저 배신하고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그의 삶은 한 번 무너진 도덕적 경계선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사의 사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구려 패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배신자의 기록이 나온다. 바로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이다. 서기 666년 연개소문의 사후 그의 권력을 계승하여 고구려 최고 권력자인 막리지가 된 남생은 지방순회 중에 그의 두 동생이 그의 권력을 탈취할 것이라는 첩보를 들었다. 그래서 수도인 평양성으로 복귀하지 않고 자신이 다스리는 국내성에 머무르며 상황을 살폈다. 결국 연남생은 자신이 다스리고 있던 국내성 등 6개 성 대략 10만 호의 백성과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서기 667년 당 황제는 연남생의 군대를 선봉으로 세워 총공격을 하였고, 이에 신라군도 연합군으로 합세하였다. 이듬해 668년 마침내 고구려는 패망에 이르렀다.
구한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 일당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사에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배신을 밥 먹듯이 한 안모라는 정치인을 필두로 여야·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마치 카멜레온 혹은 박쥐 같은 이른바 수박 정치인들이 현실 정치 권력에 기생한 수구세력의 일원으로서 여전히 건재한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세 번 일어난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이러한 배신의 비극은 굳이 권력자나 정치인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 먼 과거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현실사회에서도 그대로 계속 이어진다. 국제성행동학회의 심리학 학술지 '성행동기록보관소(Archives of Sexual Behavior)'의 2017년 연구 논문에 따르면, 연인 관계에서 외도로 신뢰를 저버렸던 이들이 다음 관계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할 확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3배나 높게 나타났다. 이는 배신이 특정 인물과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내면에 자리 잡은 행동 양식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배신의 반복 가능성은 인간의 뇌 구조와 생물학적 기제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닐 가렛 박사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반복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저지를 때 감정과 양심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의 반응은 점차 무뎌진다. 처음 배신을 할 때는 강한 거부감과 공포를 느끼지만, 뇌가 그 자극에 적응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배신은 훨씬 적은 가책으로도 가능해지는 '미끄러운 경사면'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배신을 거듭할수록 그 사람의 뇌는 부도덕한 선택을 효율적인 지름길로 인식하게 되며, 이는 게임 이론에서 말하는 '학습된 배신 전략' 즉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로 고착된다. 거짓말의 반복, 재범, 거듭되는 불륜도 뇌의 학습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똑같다. (Neil Garrett외 4인, 'The slippery slope of self-serving dishonesty, 2016').
"군자는 의리(義)에 밝고 소인은 이익(利)을 밝힌다"(논어 이인편)
미국의 정치학자인 로버트 액설로드의 연구 결과는 배신이 뇌의 학습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한 번 배신을 선택한 개체는 상대가 강력한 응징을 하지 않는 한 이익을 위해 다시 배신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았다. 배신이 '이득'이라는 학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팃포탯(Tit-for-Tat 맞대응)전략이라고 부른다. 이는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협력을 이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상호작용 전략이다. 다시 말해 처음엔 무조건 협력하고, 다음부터는 상대방의 직전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보복(배신) 또는 협력하는 방식이다. 팃포텟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맞대응으로 이득이 가장 높은 행동을 따르는 행동전략이다. 즉 처음에는 무조건 협력하다가 배신이 '이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결국엔 협력보다는 배신을 택하게 된다. 이른바, 학습된 배신전략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성취나 이익 또는 생존을 위해 한번 신뢰를 깬 사람은 언제든 조건과 여건이 갖춰지면 반드시 다시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말이 되겠다.
그 이유는 뇌의 '가소성'(Plasticity, 可塑性)때문이다. 가소성이란, 외부 자극 또는 환경에 따라 구조나 기능이 변형되고, 변형된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성질을 뜻한다. 참고로 한번 변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성질을 가리켜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이라고 한다. 비가역성은 되돌릴 수 없는 '방향성'에 초점을 두는 반면, 가소성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여하튼 뇌의 가소성으로 인해 행위가 반복될수록 양심의 가책 또는 죄책감은 줄고 이득 확보의 효율성은 높아진다. 이처럼 과학과 역사는 공통적으로 "배신은 학습되며, 뇌가 이에 적응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인류에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때 발생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진짜 다툼은 기득권과 사회정의 사이에서 벌어져왔다. 문명의 쇠망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 모순에 기인한다."- 아놀드 J.토인비 (1889~1975),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1934-1961)」
교육 철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존 듀이(John Dewey)는 이전의 경험이 현재의 사고를 거쳐 미래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유기적인 과정을 '경험의 재구성(Reconstruction of Experience)'이라고 명명했다. 경험의 재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다. 반성적 사고는 자신의 경험, 행동, 신념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경험의 재구성은 단순한 '겪음', '경험'을 넘어 반성적 사고를 통해 경험을 재조직함으로써 미래의 행동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성장하는 것이다. (존 듀이, 'How We think', 1910)
요약하면 '경험의 재구성'이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반성적 사고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미래의 경험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지혜)을 키우는 과정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류에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때 발생한다"라는 토인비의 통찰은 '반성적 사고의 결여', '경험의 재구성 실패'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앞에서는 복종하는 척하고 물러나 뒤에서 딴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신하가 임금 앞에 나아가서는 '임금님의 결정은 모두 옳습니다'라고 해놓고, 정작 물러나 뒷자리에서는 '그 결정은 옳지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하로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義理)가 아니다."-『서경(書經), 면종복배(面從腹背)』
인용구는 사자성어 '면종복배(面從腹背')의 유래가 되는 기록이다. 면종복배란,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었다"라는 의미의 한자성어다. "배신에 대한 가장 슬픈 점은 절대 적(敵)에게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이는 면종복배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다. 측근으로부터의 배신이 뼈저리게 아픈 이유는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이다. "배신은 믿음의 크기에 비례한다. 당신을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 믿었던 사람뿐이다."라는 격언도 같은 맥락에 있다.
최근 같은 진보 진영안에서 두드러진 배신의 이력을 가진 고위 정치인들이 뉴스의 전면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꽤 오랜 세월 여러번의 진보·보수 정권의 극적인 교체를 경험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친일 보수 정권은 일단 논외로 하고, 소위 개혁을 지향하는 진보 정권에 관련하여,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물들이 권력의 우산 속에 자리잡게 되면 지극히 반개혁적인 수구세력으로 변신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이한 사실은 개혁· 진보 정권에 예외없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가장 개혁적인 인물들이 가장 반개혁적 수구세력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각설하고, 한번 배신한 사람을 "다시 믿어도 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다. 이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단정 지어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한 번 무너진 신뢰의 댐은 작은 균열에도 쉽게 붕괴한다. 한번 무너진 댐은 잔해들을 모두 거두어내고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여 처음부터 다시 설치해야 한다. 배신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가운데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문제다. 더욱이 과학과 역사는 배신이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드문' 영역임을 증명해 왔다. 그럼에도 과학과 역사의 사례에서 비추어보면, 재신뢰의 판단 기준은 상대방의 뉘우치는 말 한마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자신의 뇌에 새겨진 학습된 배신의 경로를 파괴할 만큼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느냐에 재신뢰의 여부가 달려 있다 하겠다.
우리는 배신의 이력이 있는 타인에게 기회를 주기에 앞서, 그 기회가 진정한 변화를 위한 밑거름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상처를 허용하는 방치형 통로가 될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즉 배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적을 용서하는 것보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말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통찰이다. 따라서 배신과 관련하여 진정한 용서란 상대의 과거를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가 반복될 수 있음을 인지한 상태에서도 나 자신을 보호할 준비를 마쳤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서로를 향한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면서까지 서로 배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배신한 사람을 '다시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철저하게 당신의 몫이고 또한 나의 몫이기도 하다. 그것은 개인 각자가 스스로 경험의 반성적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경험의 재구성을 어떻게 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현실에서 거의 모든 판단 혹은 선택 그리고 변화와 성장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경험의 재구성이 상당 부분 좌우한다고 나름 생각하기 때문이다. 토인비의 통찰을 다시 복기해 본다. "인류에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때 발생한다". (2026.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