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격물치지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다

by 파르헤시아

최근 넷플릭스와 유튜브에서 "용감한 형사들" 시리즈를 보다가 문득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한동안 맴돌았다. 물론 이 말은 내 개인적인 경험과도 일치한다. 때문에 이 말은 언뜻 비관적인 경험론처럼 들린다. 하지만 곰곰히 살펴보면, 그 내면에는 인간의 생물학적 고착성과 역사적 반복성이라는 견고한 과학적·논리적 근거가 자리 잡고 있다.


"깊이 간직하고 있는 신념과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 파커 J. 파머, "비통한자들을 위한 정치학")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고착성


흔히 인간을 ‘교육과 의지로 변화 가능한 존재’로 정의하곤 한다. 그러나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실체는 유전적 설계와 고착화된 신경망의 산물에 가깝다. 행동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성격의 핵심 기질인 외향성이나 정서적 불안정성 등은 약 50%에 달하는 높은 유전율을 보인다. 이는 성인이 된 이후 환경내지는 외부적 압력만으로는 쉽게 변하지 않는 일종의 ‘생물학적 기본값’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제약은 뇌과학적 원리인 ‘신경회로의 고착화’를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아동기에서 청소년기 사이 뇌가 효율적인 회로를 구축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냅스를 제거하는 과정을 가리켜 '시냅스 가지치기' (Synaptic Pruning)라고 한다. 뇌에서 '시냅스 가지치기' 과정이 끝나면 뇌의 기본적인 '하드웨어' 설정이 마무리된다. (Nature Reviews Neuroscience, 2010 - "Maturation of effector mechanisms of selective attention") 또한 뇌의 통제 센터라 할 수 있는 전두엽은 20대 중반에 성장을 멈춘다.


어떤 과정이 일어난 후 시스템과 주변 환경이 스스로 처음 상태로 되돌아올 수 없는 성질을 가리켜, '비가역성'(非可逆性, Irreversibility)이라고 한다. 뇌는 생존을 위해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오랜 시간 반복되어 굳어진 사고 패턴과 행동 양식은 뇌 내에 강력한 신경망을 형성한다. 하버드 대학 의과대학의 연구 등에 따르면, 이 시기 이후의 행동 교정은 새로운 회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강력한 회로와 싸워야 하므로 물리적 한계가 따른다. 즉 뇌의 신경생물학적 시스템이 비가역성 성태로 고착된 이후, 이를 뒤바꾸려는 시도는 뇌의 항성성, 즉 본래의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강력한 복원력에 부딪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인이 된 개인의 성향을 외부에서 ‘고쳐 보려는’ 시도는 이미 견고하게 구축된 물리적 회로를 재구성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될 뿐만 아니라 성공 확률 또한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변화를 거부하는 인간 심리의 내적 메커니즘


심리학 연구에서도 인간 본성의 비가역성적 특성이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대표적으로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 부조화 이론" (Cognitive Dissonance Theory)은 변화를 거부하는 인간의 내적 메커니즘을 다룬 심리학의 고전적 자료다.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기존 신념이나 행동 방식과 배치되는 정보를 접했을 때 행동을 고치기보다 정보를 왜곡하거나 합리화하여 '자아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한다. ('A Theory of Cognitive Dissonance', 1957)


성인기의 성격에 관한 성격의 5요인 모델(Big Five) 연구에서도 마찬가지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로버트 맥크레이(Robert McCrae)와 폴 코스타(Paul Costa)는 성인기의 성격 연구를 통해 인간의 성격 5요인(신경증, 외향성, 개방성, 친화성, 성실성)이 30세 이후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일생에 걸쳐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했다. (Personality in Adulthood, 2003)


이러한 인간 본성의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역사라는 거시적 흐름 속에서도 고스란히 증명된다. 인류는 수천 년간 문명을 발전시키고 제도를 정비해 왔으나, 권력에 대한 탐욕이나 배신,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본능적 행동 양식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세익스피어의 희곡이 시사하는 점이나 동양의 법가 사상이 현대인에게 여전히 깊은 통찰을 주는 이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소프트웨어’가 역사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거의 업데이트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즉,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을 뿐, 본성 그 자체를 개조하여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난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 본성의 역사적 반복성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들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이 말은 윈스턴 처칠의 통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에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배신이나 실책을 저지르고 몰락한 후 재기 기회를 얻었을 때, 다시 유사한 과오를 범해 처절하게 패망한 사례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자신을 비롯하여 주변에서도 처절한 실패와 배신의 경험을 겪고 뼈저린 후회와 반성의 시간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유사한 과오를 반복하는 그런 사람들을 몇몇 알고 있다. 이는 개별 인간의 성향이 단기간의 충격 요법으로 교정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경험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는 사실이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사사기 2:19 개역개정 성경)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범죄자들의 재범율이다. 우리 사회의 강력범죄(살인, 강도, 강간 등) 재범률은 매우 높은 편이다. 강력범죄 수형자 중 재범자가 50%를 상회하거나 검거된 강력범죄자 40% 이상이 동종 범죄의 재범인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정부의 특사로 사면된 강력범죄자들의 재범률이 거의 40%에 달한다(국가통계포털 KOSIS 경찰청 범죄통계 2022년).


특별한 사례로 1970~80년대에 유명한 절도범으로 '조세형'이라는 절도범이 있다. 호적상 1938년 출생인 조세형은 1970~1980년대 사회 고위층을 상대로 절도 행각을 벌여 속칭 ‘대도(大盜)’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2년 체포되었으나 재판과정에 1983년 법원구치감에서 탈옥해서 다시 체포되어 청송교도소의 독거방에서 15년을 복역했다. 1998년 출소 후 자칭 "개과천선"하여 목사가 되었다. 이후 선교단체를 설립하여 선교활동, 보안업체 자문위원, 방송활동, 강연활동, 등을 하며 새 삶을 사는 듯했다.


그러나 2001년 일본의 노숙자 선교 명목으로 자주 드나들던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빈집을 털다 일본경찰애 체포되어 일본에서 3년을 복역했다. 2004년 한국으로 돌아 온 이후 2005년부터 2021년까지 계속 절도 범행을 저지르면서 체포되어 수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2023년 85세가 되던 해 또 절도범죄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 확정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다시 수감되었다. 그의 범죄 이력은 1983년을 시발점으로 해서 동종 범죄로 전과 16범이다. 말 그대로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 조세형의 사례는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폭두목으로 유명한 조양은이 목사로 변신한 사례도 조세형의 전철과 비슷하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


결과적으로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은 인간에 대한 냉소라기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생물학적·역사적 한계를 직시하라는 현실적인 권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과학과 역사가 말하는 핵심은 인간이 '아예 변할 수 없다'는 절망이 아니다. 다만, 타인이 누군가를 '고쳐서(Refurbish)' 쓰겠다는 발상은 인간의 생물학적 설계와 역사적 통계에 어긋나는 오만한 접근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내가 비록 선한 사람임을 자부하며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본성자체가 악한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점에서 나쁜 행실이 몸에 배여 있는 나쁜 사람이 나의 헌신을 통해 선한 사람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는 단지 희망사항일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과대평가하는 오만함의 발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나 자신조차도 고치기가 어려운데 어찌 남을 고쳐 쓰겠는가? 자신도 어찌 못하면서 어찌 남이 잘하기를 기대하는가?


결국 내 의지로 혹은 내 생각대로 사람을 고치려 하거나 또는 상대가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다름'을 인정하고, 이성적으로 상대하거나 자신의 생각이나 기대를 바꾸거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 될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변화는 외부의 강요나 수선이 아닌, 본인의 뼈를 깎는 성찰과 환경의 물리적 통제가 결합했을 때만 극히 드물게 일어난다. 결국 진정한 변화는 타인에 의한 ‘수선’이나 '교정' 아니라, 본인의 처절한 자기 객관화와 환경적 통제가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이 말은, 인간 혐오의 부정적 표현이라기보다는 타인의 본성 또는 성격을 바꾸려는 헛된 기대와 희망, 헛된 에너지를 아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더하여 진지한 자기 성찰과 함께 상황 또는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인류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째튼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이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 삶의 경험과도 분명히 일치한다. "제 버릇 개 못준다". 물론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20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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