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격물치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by 파르헤시아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자신의 외모뿐만 아니라 기왕이면 지적(知的)으로도 멋있어 보이고 싶어 한다. 특히 스마트한 사람, 지식인, 지성인 등과 같은 타이틀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흔히 '지식이 많은 것' 즉 '많이 아는 것', '남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곧 실력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여 누군가로부터 불쑥 모르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고, 마치 오답 노트를 들킨 학생처럼 위축되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모르는 것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는 게 싫어서 잘 모르는 주제가 나와도, 난해한 내용이 나와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을 하곤 한다. 심지어 자신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타인이 이해하고 있는 고차원적인 난해한 지식를 끌어다가 짜깁기하거나 어거지로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풀기도하고, 심지어 최근에는 AI가 만들어 준 것을 그대로 베껴서, 마치 자신의 앎처럼 자신의 이해인척 포장하여 과시하기도 한다. 게다가 어떤 이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전부 '틀렸다'거나 '근거가 없다' 또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확신을 갖고 억지를 부리는 이도 있다. 그런데 지식, 지혜, 앎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성인(聖人) 공자(公子)는 '앎'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였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앎이다" (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


이 단순해 보이는 문장 속에는 인류가 수천 년간 탐구해 온 지혜의 정수가 담겨 있다. 진짜 지혜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아는 '인식의 선'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죽음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단호하게 답했다. "삶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 "(논어/선진편). 이 말은 죽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발붙이고 있는 눈앞의 '현재'조차 심지어 삶의 주체인 자신조차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경험 너머의 세계, 자신의 인식 너머에 인식할 수 없는 세계를 안다고 자만하는 태도를 경계한 것이다. 이는 아는 척하는 허영심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그 안에서 확실한 앎을 쌓아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나는 오직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소크라테스)


서양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 역시 공자와 비슷한 통찰을 하였다. 세상에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남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안다는 확신에 차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정직하게 직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러 더욱 정교해진다.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참이라고 해도 맞고 거짓이라고 해도 맞다"(칸트, 순수이성비판')


신이나 영혼, 우주의 끝처럼 인간의 감각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은 '안다' 혹은 '모른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간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인 인간이 갖춰야 할 최고의 예의인 셈이다. 같은 맥락으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통찰한 바 있다. 이러한 겸손함은 철학의 방을 넘어 과학의 실험실에서도 빛을 발한다. 양자역학이라는 난해한 분야를 개척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65년 노벨 물리학상)은 뜻밖의 고백을 남겼다.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른다'라고 단언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 분야를 가장 깊이 탐구했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 깊이 파고들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우주는 인간의 상식적인 '앎'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오묘하기 때문이다. 결국 공자가 말한 진정한 '앎'이란 지식의 양 또는 깊이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정직함이며, 선무당이 사람 잡는 식의 확신을 경계하는 겸손함이다.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릅니다. 가르쳐 주시겠어요?" 이 짧은 한마디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고백을 하는 순간, '모름'은 '배움'으로 전환된다. '아는 척'은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이미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새로운 지식이 들어올 문은 쾅 닫혀버리기 때문이다. 생각의 꼭두각시, 생각의 노예가 되는 것은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여튼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새로운 배움이 들어올 빈 자리가 생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정확히 아는 상태를 현대 심리학에서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자기 객관화 즉 자신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으로, 흔히 '나를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의 부족함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 빈 공간, 그 부족함을 정확한 지식으로 채울 수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사람, 즉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신뢰를 얻고 스스로에게는 성장할 기회를 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지식을 대하는 정직한 태도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근거 없는 아집에서 벗어나 진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 앎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영역이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다. 다행히 배움에는 경계도 끝도 없다. (20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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