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강사는 어떻게 된 거예요?
“여러분, 오늘은 몇 월 며칠이에요?”
“무슨 요일이에요?”
“나나 씨, 주말에 뭐 했어요?”
오늘도 가장 기본적이지만 잊어버리기 쉬운 숫자와 일상 표현들을 물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왼쪽 눈살을 찌푸려가며 떠듬떠듬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느리지만 최선을 다하는 씩씩이파.
매번 머리만 긁적거리며 필기공책을 뒤적이나 끝내 엄한 곳을 찾고 있는 밉지만은 않은 귀요미파.
꼿꼿이 세운 허리로 “선생님, 바로 저예요. “를 외치는 듯한 눈으로 강한 레이저를 쏘며 소리 높이는 똘똘이들.
그리고… 무념무상, 그저 나만 빤히 바라보며 웃는 한량들까지 앞에서 보면 가관이다.
내가 처음부터 한국어 강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인생은 나의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게 우연히 “어, 어, 어”하다 눈 떠보니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마치 어떤 자석의 힘에 끌려가 떠밀려 “출발” 신호도 없이 그 길 위에 서서 전력 질주를 하고 있던 나.
벌써 15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 난 베테랑 한국어 강사가 되었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마지못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일까?
대학 시절로 돌아가보자.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나는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된다.
당시 중국 유학이 붐이었고, 호기심 가득한 미지의 나라이면서도 조금은 두려운 사회주의 국가.
난생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는 해방감과 두려움 반, 그리고 부모님의 걱정 반 모두 캐리어에 꾹꾹 담아 인생 처음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호기롭게 귀 뒤에 붙인 키미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난 심한 멀미와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는 긴장감까지 더해 그 맛있다는 아! 시! 아! 나!!!
기내식도 거부한 채 녹초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직접 운전하시는 차 외에는 멀미를 달고 사는 아이였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비행기는 여전히 멀미약과 동행중이다. 멀미는 아마도 나의 평생 친구로 남을 듯싶다. 안고 가마 내가 너를…
핑핑 도는 머리와 식은땀으로 진이 다 빠져 겨우 도착한 중국! 차! 이! 나!!
공항 안에서부터 진동하는 각종 향신료 냄새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에 다시 한번 현기증이 났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겨우 도착한 학교 기숙사에서 나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그해 1년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낯선 중국어에 적응하느라 참으로 고욕이었다.
한국에서 즐겨 먹지 않던 한식들이 그리웠고 매일 눈물이 났다. 아니, 나 원래 한식 좋아하던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 시급했던 나의 중국어.
4가지 발음을 각기 다르게 내야 하는 성조라는 녀석과 씨름하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아팠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먹는 것과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안겨준 나의 첫 중국 입문기!
그렇게 힘든 1년을 보내고 중국생활 2년 차에 4학년이 되면서 슬슬 취업을 걱정하던 시기였다.
어느 날 교수님 한 분이 내 속을 다 알기라도 하신 듯이 인자하게 웃고 계셨다.
“너 한국어 강의 한번 해 볼래?”
나이가 지긋하셨던 나의 모교 교수님이 중국 대학 한국어과에서 한국어를 강의하고 계셨고 마침 저녁 자습시간에 지도 강사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중국어 초급 수준이었던 나는 무슨 용기에서인지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을 외치고 있었고, 난 매일 저녁 자습시간에 투입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의 한국어 강사 길이 열리기 시작한 그 순간.
당시 중국 대학생들의 학업량은 마치 우리의 고등학생과 비슷했다.
나는 매일 조사 -은/는,-이/가부터 문법 책을 찾아보며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글자들을 읽고 또 읽으며 이해해야 했고, 유치원 꼬마들보다 못한 중국어 실력으로 한국 문법을 설명하려다 보니 대본까지 써가며 외우고 또 외웠다.
솔직히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달달달 외웠다.
친한 친구 앞에 서서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보이려 마치 연극배우가 연기 연습하듯 반복하며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초보였지만 초보라고 들키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내 나라 언어도, 저 나라 언어도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느낌
갑자기 보고 있던 한국어 문법 책을 쫙쫙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한국어? 나 중국어 배우러 온 거 아니었나?” 눈물이 핑 돌다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처음으로 멘털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값진 언어 환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나로서는 두 가지 언어를 소화해 표현해야 한다는 그 무게가 무척 버거웠나 보다.
그렇게 나는 방과 후 자습 지도를 시작으로 팔자에도 없던 강단에 서게 되는 기회가 주어졌고 다시 몇 해가 지나고 지나 눈 떠 보니 나는 기업강사가 되어 있었다.
시작은 우연한 기회였지만 차후 진로를 결정하는 매 순간순간의 고민과 불안은 항상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난 결국 이 길을 지금까지 씩씩하게 걸어왔다.
눈물 콧물 짠내 나던 나의 스토리도 있지만 소중한 추억 가득 안겨준 사랑스러운 학생들이 가장 큰 버팀목이다.
상기된 두 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눌러쓴 나의 한국어 강사 성장기.
서걱서걱, 서걱서걱서걱,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