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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서김 Sep 15. 2020

넌 진보냐 보수냐

  베트남 나짱에 가는 비행이었다. 소문이 무시무시한 K 기장님과 함께하는 비행이라 출근 전부터 긴장했다. K 기장님은 일찍 출근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분 출근 전에 비행 브리핑 준비를  끝내려고 쇼업* 1시간  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일반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다. 직장 상사가 자신보다 일찍 출근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이유 없이 죄지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그래서 쇼업시각 보다 훨씬 일찍 출근했다. 회사 컴퓨터에 로그인  출근 기록을 입력하고 비행 브리핑 준비를  시작했는데 기장님이 오셔서 깜짝 놀랐다. 보통 다른 기장님들은 쇼업 5 ~ 10  전에 출근하기 때문에 일찍 출근해봤자 30 전에 오실  알았다. K 기장님은 쇼업 1시간 전에 출근했다. 일반적인 통념의 범주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 참고로 부기장들은 처음 보는 기장님과 스케줄이 매칭 되면 비행   기장님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한다. 이전에  기장님과 비행한 경험이 있는 다른 부기장에게 연락해 그분의 성격은 어떤지,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이 있는지 물어본다. K 기장님의 특징은 일찍 출근하고, 비행 관련해 많은  질문하는데 모르면 질책한다는 거였다. 부기장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지금은 많은 기장님들이 좋은 칵핏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권위적인 분들이 많았다. 어떤 기장님은 처음 보자마자 대뜸 “나에 대해서 조사해 왔지?”라고 묻는 분도 있었다. 알아서 본인 심기 건드리지 말고 옆에서 잘하라는 뜻이다.

 요즘에는 짬도 조금 차고 요령도 생겨서 처음 보는 기장님과 매칭 되어도 다른 부기장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그냥 출근한다. 신입 시절에는 워낙 겁쟁이였던지라 조금이라도 알고 가면 도움될까 싶어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철저히 준비했다.

 브리핑실에 K 기장님이 들어서니 모든 기장, 부기장이 차례로 인사했다. 대부분 조종사  분보다 후배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데 다른 부기장들이 내게 안타까운 눈빛을 전한다. K 기장님은 같이 비행하는 부기장을 비행 내내 많이 갈군다고 소문나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부기장들은 내가 잠시  어떻게 깨질지  알고 있었다. K 기장이 내가 자리 맡은 책상에 왔다. 90도로 인사하고 쳐다봤다. 외형은 키가 작고 어깨가 처졌다. 얼굴을 보니 처진 어깨와 비슷한 각도로 입꼬리가 내려가 있다. 세상이 불만족스러운 사람은 입에서  성격이 드러난다. 역시나 오자마자 비행 관련한 여러 가지 지식을 물어봤고, 당시 초보 부기장이었던 나는 대답을 잘하지 못했다. 회사에 일찍 출근하는 이유는 부기장을 시험하고 타박하려고 가 아닌가 합리적 의심을 했다. 못할 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이런 것도 조종사라고..’하는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 질책했다. 이후 남는 시간에는 회사의 여러 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회사가 세운 모든 정책이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앞으로  분과 베트남 비행을 1 2 함께  예정이었다. 브리핑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다 유리창을 슬쩍 봤다. 반사된 유리창에는 일직선이던  어깨가 어느새  처져 있었다. 다크서클이 심하게 밑으로 내려왔다.  굽고 어깨 쳐진 너구리가 힘없이 비행 가방을 끌고 걷고 있었다.


 회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지금은 상상할  없는 많은 인파가 인천공항을 메웠다. 사람들을 뚫고 최단코스를 이용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를 마친 비행기는 승객을 싣고 베트남을 향해 이륙했다. 고도 35,000 피트(해발  10km)에서 비행기는 상승을 멈추고 안정을 찾았다. 기장님이 기내방송으로 승객들에게 비행시간과 베트남 날씨 등을 방송했다. 이제 조종사들의 바쁜 시기는 끝났다. 우리는   돌리고, 객실 승무원들이 바쁠 차례다.

 밀폐된 칵핏, 60 남성과 30 남성이 나란히 앉아있다. 60 남성이 30 남성을 향해 물었다.

 진보냐 보수냐

 정치 얘기를 좋아하는 기장은 보통 본인의 정치성향을 드러내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욕하면 거기에 맞춰드리면 된다. 그런데  기장님은 대뜸  정치성향을 먼저 물어봤다. 이제부터 나 홀로 눈치싸움이 시작이다. 1시간  브리핑실에서 기장님이 본인 소개를 했다. 공군에서 전투기를 몰았고, K항공에서  평생 일하다    우리 회사로 이직했다. 나이는 60 넘었다.  복무 시절 능력이 출중해 국가에서 많은 혜택 받은  자랑했다. 젊은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불만이 많다. 진보보다는 보수일  같은 직감이 들었다. 보수로 정했다. 고개를 돌려 기장님을 힐끗 보니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사뭇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기장님, 저는 보수입니다.”

 갑자기 기장님이 이마의 근육으로 눈을 크게 떴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이마는 수축하면서 주름이 생겼다. 밑으로 쳐진 입이 심상치 않게 꿈틀 거린다.

? 어린놈이  진보가 아니고 보수야? ?”

 틀렸다. 큰일 났다. 진보인가 보다.

.. .. ..  정확히는 중도보수입니다. 저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합니다...”
됐다. 집어치워

 기장님은 파란 지지자였다. 젊은 사람 입장에서 과연 진보인가 하는 의구심이 얼핏 들지만 본인 스스로 진보라고 하니 진보진영이신가 보다. 참언론인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본인은 원래 정치를 몰라서  시절 받은 세뇌로 보수였다가 참언론을 접하고 진보가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을 오가는 1 2 동안 칵핏 안에서 나는  잘못된 사상을 뉘우치면서 열심히 진보를 지지했다. 집에 가면 뉴스공장을  보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봤다.

 그렇다. 나는  달에도 차례 줏대 없이 정치성향을 바꾸는  시대의 변절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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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업(Show up) : 조종사, 객실 승무원은 일반 직장인들과 달리 스케줄 근무를 하다 보니 출근 시간이 일정치 않다. 쇼업은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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