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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즈 Apr 04. 2023

내 인생에 정체성이 없다고 느껴질 때

인생이 내 맘 같지 않아서 좌절하는 이들에게

꽤 오랜 기간 나의 꿈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었다. 어떤 종류의 예술인지 밝히지는 않겠다. 퍽 여러가지 종류의 예술을 좋아했고, 남들보다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아이러니컬하게 예술가로 성장하는 길은 단호히 차단되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대체로 생각지 않았거나,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길로만 끌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장래희망 같은 것은 가질 필요가 없다고 극단적으로 사고했다. 


뒤돌아보면 나의 10대는 비교적 찬란했고, 20대는 찬란함을 포장할 껍데기가 부족해서 암울했다. 하지만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던 경로들을 거치는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인생이 커다란 도화지 위에 무엇인가 완성되어야 하는 그림인데, 그 그림을 점으로 잇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것과 한번에 이어질 수 없는 점이라, 여기저기 점을 찍다보니 "왜 이런 정체성 없는 희한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30대가 되었고, 30대는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조합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시간으로 채워갔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가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계획 없고, 흘러가는대로 가보려 한다"고 답한다. 물론 당연히 "무계획"은 아니다(참고로 나의 MBTI 타입은 'J'로 끝난다). 하지만 장황히 누군가에게 설명할만큼 원대하거나 촘촘한 인생경로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대로 된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이 내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 인생은 큰 도화지에 그리는 '그 어떤 그림'이 맞았던 것 같다. 아직도 그 그림의 완성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어떤 장면을 그리려고 하는지 구분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자'가 되었다. 부끄럽지만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매사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게 아니고, 항상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사정이 좋을텐데"라는 후회가 연속되는 인생이라 그렇다. 그런 내가 어쩌다보니 '공부가 직업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더 신기한 것은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 날의 꿈이 모조리 지워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북한학박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회과학자가 되었지만, '예술을 통한 정치사회화'를 전문분야로 하고 있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꼬마는 비록 예술작품을 생산 혹은 구현하는 일은 아니지만, 예술을 수단으로 북한을 읽어내고 남북관계의 해법을 모색하는 어른이 된 것이다. 


먼 훗날 나의 40대와 50대와 60대가 어땠다고,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어떨 것이라고 그때도 어디엔가 글을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글을 다시 들추어보면서 별걸 다 심각하게 썼다고 귀여워할수도 있겠다. 그때는 그림이 완성본에 더 가까워졌거나, 이미 완성된 그림을 덧칠하거나, 혹은 더 큰 그림을 그리려고 새 도화지를 붙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 앞에 주어진 길을 묵묵하게 걸어나갈 생각이다. 여전히 인생은 내 맘 같지 않고 이해 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지만, 충실히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모여서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경험의 축적이 앞으로도 나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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