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개월간 60개업체의 소개서를 만들면서 느낀 것들을 정리해봤어요.
지난 5,6개월간 60개 정도 업체의 소개서를 제작해야했어요. 다양한 클라이언트님들의 플젝을 동시에 받다보니 이런 극한의 스케쥴이 만들어지고 말았죠. 허리와 손목이 잘게 부스러지는 듯 해서 얼마 전 부터 요가를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건 좋은 동기부여가 돼요. (헛소리).
소개서를 만드는 일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다른 업체의 사업구조와 수치를 한 눈에 볼 수 있죠. (한 눈에 들어온다면) 다양한 아이디어와 아이템에 대한 고민도 해볼 수 있구요. 더불어 아이템에 따라 특색있고 포인트가 딱 살아있는 디자인과 워딩, 내용구성 등 만들면서도 오우! 놀라운 발상인데?...싶은 멋진 회사들이 많았어요. 팔딱거리는 싱싱한 레퍼런스들을 하루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큰 사람이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물론 큰 사람이 되진 않았습니다. )
대부분의 회사는 아주 멋지고 끄덕거려지는 소개서를 제작해요. 하지만 그 중 몇몇 안쓰러운 소개서들도 존재하기 마련이죠. 대부분 소개서란 극과 극을 달려서 '좀 괜찮네?' 수준은 많지 않아요. 대부분은 진짜 개잘만들거나, 나도 모르게 두 볼을 감싸게 되는 소개서로 나뉘죠.
이유는 극명해요. 내부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빛나게 자리하고 있는 곳은 일단 때깔부터 달라요. 뭔가 정제된 워딩과 도표에서 기획자의 손길이 따스히 느껴집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디자이너, 마케터, 기획자를 겸업하고 있는 다재다능한 인재라거나, 누군가의 영혼과 육신이 갈아넣은 소개서는 달라요. 한이 서려있죠. 소개서를 만지다보면 섬찟한 오한이 느껴지거나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특이한 경우가 하나 더 있는데, 외주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이 경우에는 이미 다음장을 넘기기도 전에 다음 장의 디자인이 어떨 지 대략 그려지는 아주 교과서적인 레이아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워딩도 굉장히 22세기를 지향하는 워딩으로 광채를 아주 그냥...파아아아아아아아!!!!!!!!!
여튼. 잘된 케이스를 얘기하면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잘된 이유는 너무 다양하거든요. 하지만 망한 소개서의 이유는 대부분 비슷한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이건 아주 안타까운 일이죠..분명히 자세히 살펴보고 한참 들어보면 아주 멋진 아이템이기도 하거든요. 이건 마치 달고 맛있는 오렌지에 파란색 페인트를 칠해서 엉망진창으로 보여주는 것과 비슷해요. 그러니 최선보단 최악을 택하지 않는 방향으로다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꾸 같은 소릴 하면 안돼요. 글자만 많아지고 지루해져요. 나루토가 뒤로 갈수록 회상 오져버려서 폭망한 것을 기억해야해요.(그걸?...) 동어 반복은 이런 경우를 의미해요.
ex) 브랜드의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확립합니다 : 디자인의 논리성을 부여하고, 브랜드를 가시화 시킵니다. 확립된 디자인을 어쩌고.....
앞뒤가 다 똑같은 얘기예요. 땡땡 뒷쪽 문장은 완전히 지워버려도 무관한 상태죠. 디자인자체가 '가시화'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체계적이란 단어에 '논리성'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 뒤는 모조리 뱀다리예요. 이런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3가지예요.
1. 쓰면서 생각하면 안돼요. 생각을 하고 써야지.
2. 여백을 두려워하면 안돼요. 눈도 쉴 곳이 있어야 해요.
3. 읽는사람은 바보가 아니예요.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다 이해해요.
도식과 차트는 텍스트로 설명하기 힘든 걸 한 눈에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요. 근데 도식이 더 어려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그래프란 건 딱 보자마자 한 눈에 상승인지 하강인지 이해가 되어야 해요. 도표에서도 어딜 봐야할 지 정확히 표현이 되어야 해요.
이렇게 딱 보여야 해요.
도표가 자꾸 복잡해지는 이유는 아래와 같아요.
1. 모든 수치가 너무 소중해선 안돼요. 숫자는 원인과 결과로 나뉘어요. 결과를 강조해주세요.
2. 그래프는 올랐다!내려갔다!보합이다! 세 가지 방향밖에 없어요. 그 방향성만 강조해주면 돼요.
3. 도식에 쓰이는 아이콘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예쁜 건 둘째 문제예요.
수치는 확실히 많은 텍스트를 함축할 수 있어요. 대부분 회사소개서에 들어가는 수치는 자랑용도로 쓰이죠. 우리가 이만큼 잘했다!라는 의미로 활용해요. 그런데 자랑이 너무 많아지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워진단 말이죠. 숫자를 쓸 때는 유의미한 숫자만 써주세요.
이렇게 유의미한 것만 있어도 충분해요. 결국 2014년에 제일 높았다! 라는 의미잖아요. 나머지 년도의 숫자는 이 도표에서 무의미해요. 굳이 몇 퍼센트가 늘었는지를 설명할 게 아니라면 말이죠.
이건 마치..그 뭐시냐. '한국 전자IT산업 융합 전시회' 와 비슷한 거예요. 일반명사를 이렇게 마구 합쳐놓으면 무슨 말인지 들어오지 않아요. 블록체인 기반 소비자영상콘텐츠 제작플랫폼. 이런 것도 마찬가지예요. 보면 이해는 되지만 어디 이게 입으로 다시 말하라면 나올 수나 있을까요.
명사는 붙여쓰는 게 아니예요. 짧은 문장으로 쳐주던가, 정히 어렵다면 '소비자 가전 전시회' 등으로 좀 쉽게 바꿔주도록 해요. 아침에 DDP에 한다는 저 행사 이름보고 소름이 돋아서 원....
공무원스러운 수식어 못지않게 이해를 방해하는 건 추상적인 녀석들이예요.
브랜드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기업의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참된 가치가 본질을 다할 수 있게 명확한 색깔로 정립하여 세상에 나아가게 만듭니다.
등등...UN평화대사 연설문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이 가득해선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요. 사람은 항상 어떤 정보를 받아들일 때 이미지화 시키고 추상화를 시키는 작업을 거쳐요. 이미 추상적인 단어들은 들어오자마자 흩어져버리기 마련이죠. 어떤 이미지로도 메타포를 형성하기 어렵거든요.
이런 추상적인 단어가 자꾸 나오는 건 3가지 이유가 있어요.
1. 약간 이상주의자 성향이 강하다.
2. 사실 내가 하려는 BM이 돈이 안된다.
3. 사람들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다.
강조색은 소개서 전체를 통틀어 1개면 충분해요.
포인트가 살아있는 페이지가 있는 것은 매우 훌륭해요. 근데 모든 페이지가 다 개성이 넘쳐서 날뛰기 시작하면 이건 거의 소개서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려요. 한 장 한 장에 힘을 싣는게 아니라, 전체 맥락을 봐야해요. 소개서는 앞 3장에서 좌우된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 3장만 기똥차게 이쁘게 만들고 뒷장은 개판치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안물안궁 콘텐츠가 많아요.
직원들의 개인소개나, 10년뒤 계획이나, 사무실약도는 왜 집어넣... 제품의 상세스펙도 사실 지금 단계에선 필요없어요.. 그러지말아요. 어펜딕스는 앞에서 못했던 말을 마구 풀어놓는 비하인드 영상이 아니예요. 앞 장의 내용이 이해될 수 있게 좀 더 보충할 수 있는 자료를 넣는 곳이죠.
소개서에선 계속 이게 문제라고 막 그러는데..막상 듣는 사람은 코후비게 되는 그런 경우예요. 그게 문제였어??... 난 별로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요. 문제를 규정하는 단계에서 공감을 얻지 못하면 이 후의 모든 내용은 설득력을 잃어버려요. 그게 나의 실생활과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데이터나 레퍼런스적으로 근거가 명확해야 해요. 제가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아이템은 이런 것들이었어요.
1)
외국은 전봇대가 엄청 엄청 멀리 떨어져있잖아요. 땅덩어리가 크니까. 근데 그걸 언제 사람이 하나하나 결함을 체크하고 있겠어요. 새집도 있을거고, 단선된 곳, 지반이 무너진 곳, 노후된 곳, 피복이 벗겨진 곳 등등..엄청 많은 트러블이 있을텐데. 그래서 드론으로 전봇대와 전선의 상황을 일괄체크하는 시스템이었어요. 3D모델링도 되고 결함의 종류도 분석되더라구요. 박수를 딱 쳤어요. 오.. 그렇네. 그럴 수 있겠다.
2)
칠레에선 해산물이 많이 나는데, 독성이 가득한 해산물이 많아요. 자칫하면 어부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죠. 그래서 독성을 판단하는 키트를 개발했어요. 이것도 박수를 딱 쳤어요. 아주 훌륭하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고 납득이 가는 것들이거든요. 그런데 만약 이런 식이라고 생각해봐요.
'혼밥을 하면 외롭다! 그러니 자꾸 체하고 소화가 안되는 것이다! = 그러니 랜덤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만들자! 이름하야 소개팅식당!!~'
ㅇㅅㅇ............?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이것보다 더한 곳들도 꽤나 많아요.
스토리텔링과 브랜딩이란 단어에 흠뻑 빠져버리신 분들은 브랜드의 가치에 중심을 두어요. 그래서 로고설명부터 색상설명까지 온갖 자신의 브랜드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의미가 충만한 지 설명하려고 해요.
놉.
소비자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당신의 로고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 필요도 없구요. 자꾸 가르치고 주입하려고 해선 안돼요. 그들이 궁금해서 찾아보게 만들어야지.
브랜드 가이드는 상대방이 궁금해죽겠어서 "어떤 뜻이예요?" 라고 물어왔을 때.."아~~ 사실은..." 하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 존재하되 뒤에 숨어있는 것과 같다구욤. 그걸 전면에 내세워서 브랜드스토리가 구구절절(심지어 각 스토리도 모두 다름..) 나와버리면 이건 브랜드를 설명하기 위해선 제가 LA에 있었을 때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와 비슷한 얘기에요.
브랜드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마인드와 행동은 옳지만, 그건 내 맘속에 존재하는 거예요. 소비자들에겐 당신의 아이템으로 증명하세요. 구구절절한 스토리말고.
결론 :
모든 문제는 항상 과유불급에서 시작되는 것 같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