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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선 Nov 30. 2019

여러분은 브랜딩을 못합니다.

브랜딩을 잘하고 싶습니까?그렇다면 벨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벨은 브랜딩을 무척 사랑한다. 벨은 평범한 스타트업의 브랜드 기획자로 입사한 지 5개월이 지났다. 벨은 이곳이야말로 자신의 내공을 보여줄 훌륭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기업은 내 성격에 맞지않는다. 벨은 자유롭게 의견을 쏟아낼 수 있는 스타트업을 사랑했다.


출근이 편해야 하므로 역삼역 부근 1,000에 70짜리 분리형원룸을 선택했다. 버는 돈과 나가는 돈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벨에게 어울리지 않았다.벨은 공격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브랜딩이란 그런 것이다.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 벨은 불확실성에 도전한다. 에어팟프로가 나왔다. 불확실성을 시험하기 좋은시점이다. 3개월 전 친구에게 빌린 200만원 중 일부를 과감히 투자하기로 한다. 누가 구매라고 했나. 이것은 훌륭한 사용자경험을 시험해보기 위한 당연한 브랜드 담당자의 의무인 것이다.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쩐다는 말에 비판적인 태도로 청음을 해본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후기를 남길 생각이다.


벨은 5시가 되어감을 깨달았다. 6시엔 벨이 한 달에 한 번씩 참여하는 독서모임이 있다. 트렌디한 코디를 해본다. 29cm에서 구매한 7만원짜리 맨투맨티는 아무 브랜드도 없는 깔끔한 타입이다. 박시하게 떨어지는 게 매우 힙하면서도 캐쥬얼한 느낌을 준다. 목 뒤가 좀 까끌거리지만 그건 택을 잘라내면 될 일이다. 뒷 목을 긁으며 벨은 문을 나선다. 오늘의 책은 굉장했다. '웨이 오브 브랜드'. 세계적인 브랜드회사의 수석 브랜드총괄 두 명이 공동집필했다고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와 심플한 표지는 벨을 아주 지적이고 프로페셔널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은 벨이 직접 제안한 것이다. 오늘이야말로 벨의 내공을 가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날이다. 벨은 배우는  즐거운 사람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페이스북에 들어가 팔로우한 페이지의 글을 살펴본다. 제목이 매우 자극적이다. 오우... '브랜드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7가지 리더의 자세' 라니. 이것은 저장해야 할 것 같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글을 공유하며 코멘트를 덧붙인다. '브랜드의 팔 할은 리더의 역량에서 비롯된다. 리더가 조급하면...' 이라고 몇 줄을 적었다. 너무 길게 적으면 쿨하지 못하니까. 이로써 조금 냉정하지만 날카로운 인사이트를 지닌 브랜드 담당자의 이미지에 한층 가까워질 것이다


오늘 모임장소는 서촌부근 한옥을 개조해만든 힙한 곳이다. 의자는 손바닥 두 개만하고 철제 책상에 닿은 팔꿈치가 시렸지만 이것은 브랜드경험의 일환이다. 이런 불편함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앗! 저길 보자. 천장위의 풀들이 사람들의 동선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캬아...이것은 숲 속을 거닐게 하고 싶은 주인의 의도가 녹아든 것이다.


연신 사진을 찍고 있을 때쯤 한 두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날씨가 꽤나 쌀쌀해졌네요. 전 감기에 걸렸어요. 오늘 책 어떠셨어요? 등 형식적인 몇 번의 대화가 오고난 후 모임장이 도착했다. 오늘은 처음 보는 얼굴들도 몇 있었다. 간단하게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동안 자기소개가 오고간다. 오늘 새로 온 사람은 어떤 기업의 BX팀에 있다고 한다. 오옷? 나와 비슷한 직군이군. 하지만 생긴 걸 보아하니, 아직도 탐스의 성공사례를 들먹이며 한  간 레퍼런스에 빠져있을 듯한 여드름 덕후 느낌이다. 후후 난 이제 갓 투자받은 뜨고 있는 기업에서 생생한 브랜딩을 하고 있다구.  그 옆에 앉은 안경 쓴 젊은 녀석은 마트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좀 쩔어있는 모습이 동네에서 편집샾 따위를 하는 모양이다.


책에 대한 얘기가 오고가는 듯 하더니, 이내 각자의 일에 대한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마트를 하는 녀석은 별다른 브랜딩이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찌라시와 엘리베이터 광고 등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벨은 생각한다. 하아...이제 나의 내공을 발휘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너무 건방지지 않게 책의 내용을 잘 가미해서 내가 얼마나 브랜딩을 잘 하는 지 넌지시 전달해볼 참이다. 일단 진짜 멋져요. 란 말로 밑밥을 깔고 '저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 책에 보니 도움되는 내용이 있더라구요' 라는 훌륭한 도입부로 녀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좋았어 이제 자본의 계층화와 사람들에게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 지, 마트의 컨셉을 잡고 그것을 소비자에게 유입시키기 위해선 함의와 전달, 실행의 3요소가 중요함을 알렸다. 녀석은 끄덕거리며 나의 지식에 감복한 듯 했다. 동공이 확장되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게 적잖은 지적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한 마케터는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하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데 윗선에서 그것을 고집하고 있어서 힘들다고 했다. 저런저런... 컨셉을 잘못잡았군. 진정한 마케터라면 그런 걸 상사에게 관철시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전략을 변경해야지. 넷플릭스나 아마존의 사례에서도 그러했다. 기획하고 투자하고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게 기본아니던가.


독서모임이 끝난 후 수많은 얘기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벨은 돌아오는 길에 인스타에 힙한 카페 사진을 올리며, 브랜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삽질을 하고 있는 지 겸손한 언어로 적어보았다. 좋아요와 공감한다는 댓글이 달리고 우린 언제보나요ㅠㅠ 등과 같은 메시지가 날아온다. 은 기분이 좋다. 브랜딩을 한다는 건 꽤나 멋진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법처럼 다루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걸 멋있어 한다.


다음 날 벨이 출근했다. 팀장은 벨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기획했던 것과 견적이 달라졌냐는 것이다.


당연하다.


브랜드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퀄리티 관리가 필수다. 팀장은 회사 전체의 컨셉을 관통하는 브랜딩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팀장은 그것 됐다며, 비교견적은 자신이 정리하겠다고 했다. 로고디자인이 계속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해한다. 로고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리브랜딩을 위해선 그 만한 고민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자꾸 재촉하라고 하지만, 난 디자이너 분을 존중한다. 프로모션 기획안을 깜박했다. 그래 그건 인정한다. 약점이 있을 수 있다. 벨은 손이 빠르지 않다. 사람은 다 자신만의 달란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팀이 있는 것 아니던가. 내가 못 쓴 기획안은 쟤가 써줄 수도 있는 거잖아. 협업이란 걸 좆도 모르는 팀장이다.


팀장은 부스기획 진행건에 대해 물었다. 맞아, 안그래도 벨은 여기에 대해 할 말이 있었다. 벨은 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팀장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잠시 이마를 만지작 거리더니 그럼 회의실로 가자고 했다. 벨은 준비했던 생각을 말했다. 불특정다수에게 스치듯 찌라시를 건네는 박람회 부스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고객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의 이야기를 쏟아내보았다. 팀장은 일단 알았다고 한다.


곧이어 대표의 미팅이 이어졌다. 대표는 지금 자금사정도 그렇고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아 일단 진행 중인 걸 끝마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벨은 생각한다. 이것은 너무 소극적인 선택이다. 브랜드를 성장시키고 싶어서 나를 뽑지 않았나! 나는 지금 브랜드를 성장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비용문제를 들먹이다니. 감히 돈때문에 브랜딩을 못한다고?? 벨은 화가난다.


벨은 퇴근 후 8시에 진행되는 브랜딩 스터디에 참여했다. 이태원 근처의 개멋진 문화공간에서 진행되는 스터디는 12명 정도가 모인다. 다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에 다니는 분들이다. 벨은 이 분들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자신다워졌다.


오늘의 분함을 컨텐츠 사업을 하시는 친한 대표님께 털어놓았다. 그 대표는 2년 째 사업을 하고 있다. 뉴스레터와 유튜브 채널로 3만 이상의 구독자를 모았고 한 두개의 터진 콘텐츠로 강의와 칼럼을 쓰기도 했다. 매출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은 1인 기업이 체질에 맞다고 했다. 주로 같은 코워킹스페이스의 옆옆방을 쓰고 있는 작은 스타트업 투자사에서 주최하는 언박싱데이나 브랜드데이 같은 이름의 행사에서 강의를 하는데 1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25만원쯤을 받는 듯 하다. 사람들은 오늘도 너무 잘들었다며, 감사의 톡을 날리고 대표는 그 톡을 캡쳐해서 페이스북에 올리며 그들에게 다시 감사와 공을 돌린다. 겸손하신 분이다. 그가 위워크 냉장고의 베지밀을 쳐먹으며 저녁밥을 때우거나, 근처 한솥도시락에서 도련님 도시락을 사며 손을 떤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벨은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 줄 분은 그 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브랜딩을 하겠다고 하면서 자꾸 결과측정에 대한 얘길한다. 브랜딩이 어디 그렇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냐' 라는 하소연을 하자 컨텐츠기업 대표가 맞장구를 치며 짠을 권했다. 그들은 언박싱데이라는 뭘 꺼내는 진 모르겠지만 존나 힙한 포스터를 자랑하는 행사에서 공짜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케이터링은 또 옆 사무실에서 행사대행을 하는 스타트업에게서 지원받은 것이었다. 닭봉과 짭쪼롬한 감자튀김, 약간 밍밍한 쿠키와 방울토마토가 그럴싸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맥주를 한 거품 들이킨 대표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근시안적인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 직원들이 괴로워지는 것 같아요. 하아 근데 사실 나도 그렇게 인사이트가 있진 않거든요. 그래서 1인기업이 편해. 난 직원뽑으면 엄청 괴롭힐 것 같아. 이 전 직장에서 내 부사수가 엄청 힘들어했거든. 근데 종종 연락하는데 이번에 카카오 게임즈 브랜딩팀으로 들어갔더라고. 진짜 나랑 일할 때 성장한 거 보면서 뿌듯하더라니까요'


우와 개쩐다. 벨은 놀란다. 나는 왜 이런 사수가 없을까를 고민해보았다. 벨의 회사대표는 이번에 벨에게 제품인증 관련해서 몇 개의 업무를 맡겼다. 또 부스에 필요한 물품을 리스팅하고 검수하는 정도의 일을 부탁하기도 했다. 벨은 답답하다. 브랜딩을 하려고 왔는데 내가 왜 물품을 검수하고 있어야 하는가. 난 모든 서비스의 컨셉을 기획하고 그 전략을 구축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리더의 자질은 적재적소에 인원을 배치해서 그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사람이라고 그랬다. 난 현장이나 창고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큰 프레임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닌가.


세계적인 광고회사 WWP는 상징적인 브랜드일수록 소비자의 최초상기인지도가 60퍼센트 이상 높다고 발표했었다. 주목성, 지속성, 독창성 면에서 우리 브랜드는 너무 협소하다. 펫 시장은 점점 늘어가고 있는데 지금 부스참여나 하고 있는게 말이나 되는가. 어서 작은 팬덤을 형성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바이럴이 일어나게 해야할 텐데. 견적서 하나에 고민하고 있는 대표는 한심하다.


벨은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곧 토크세션이 출연할 분들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오씨 존나 멋진 분들이다. 내가 어제 샀던 쿨다리배게의 상품기획을 했던 분 아니던가. 그 분은 스타벅스와 블루보틀의 성공요인과 BTS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래 바로 저게 브랜딩이다! 벨은 동공으로 환호를 내지르며 팬티를 갈아입고 왔다. 우리 회사 매출은 진짜 쥐좆만하다. 이런 작은 회사에선 나의 거대한 인사이트를 담을 수 없다. 십만원 백만원에 부들거려서는 어떠한 기획도 할 수 없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팀장은 너무 쪼잔한 숫자놀음에 벌벌 떨고, 대표는 영업뛴다고 싸돌아다닌다. 마케터와 디자이너는 매일 밤을 새는 듯 하지만, 자신과 상의하지 않는다. 그러니 밤을 새는 거다. 벨은 아무래도 오래있을 곳은 아닌 것 같다며 손절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벨은 이윽고 등장한 연사를 보며 두 손을 모았다. 그것은 세비야 대성당 속 금으로 떡칠해놓은 조각상의 장엄함을 바라보듯 눈부신 경험이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감동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벨은 그에게 달려가 명함을 주며 말했다. 벨은 회사의 브랜딩을 총괄하고 있고, 곧 제품런칭이 진행된다고 했다. 이건 내가 만든거다. 지난 5개월 간 내가 얼마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벨이 밤마다 먹은 치맥을 생각해보니, 보리와 닭의 씨를 말리는 대학살자로 가까운 시일 내에 기록될 것이다. 벨은 뱃살을 수습하며 강사에게 궁금했던 점을 쏟아놓는다.


브랜딩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지속성과 고객이라고 했다. 그렇지! 씨발 이거다. 고객이 없이 어떻게 회사가 있을 수 있나. 우리 회사는 고객을 너무도 모른다. 강사는 한참을 대답하더니, 혹시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에 한 번 나와서 인터뷰해 볼 생각 없냐고 했다. 실무자의 의견을 듣고싶다며 벨을 지목한 것이다. 벨은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나타났어...


벨은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렇게 내 콘텐츠를 만들어야겠어. 브랜딩을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키우는 것이 옳지 않겠나. 이 강사님의 인사이트라면 함께 글도 끄적이고 유튜브도 찍으면서 존나 터질만한 콘텐츠가 나올거야. 벨은 회사생활은 이 정도했으면 됐다고 생각한다. 벨은 일을 잘하는 편에 속한다. 일잘러들의 이야기를 담은 브런치글을 읽으며 무릎을 쳤기 때문이다. 벨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프로필 문구를 바꾼다. '기로에 서다'


벨의 손엔 '브랜딩이 회사를 만든다' 라는 책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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