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힘이 온전히 실리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가. PSK의 컬처덱
PSK와의 인연은 꽤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약 2023년 6월. 컬처덱 의뢰가 왔더랬죠. 그 때도 이미 뭔가 만들어져 있긴 했었어요. 다만 다양한 영역(제도나 시스템)과 잘 연결된 느낌이 아니었나봐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미션, 비전, 핵심가치를 뚝딱뚝딱 만드시면, 우리가 구체화해서 다듬어 드려보겠다~ 제안드렸었죠. 그게 2023년 7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이 흘렀죠.
그간 PSK 내부 TF팀은 엄청 고생해서 뭔가를 만들어내셨어요. 10장 내외의 훌륭한 초안이었죠.
몇 가지 수정을 해야 한다면, PSK가 글로벌기업이라 생각보다 다양한 언어를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또 기업 자체의 문법이 굉!장!히! 직관적이고 드라이하단 점이었죠. 나중에 쓰면서도 느꼈지만 수식어를 극도로 싫어하셔서, 진짜 S-V-O 3형식만 딱 남게 되더라고요.
기업의 언어라는 게 참… 이렇게 독특하고 색깔이 진합니다.
PSK는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하드웨어를 만드는 곳입니다. 특히 PR Strip 분야는 세계1위, 드라이 크리닝 (빨래 말고 반도체 작업할 때, 주요 회로 이외에 나머지를 깎아내는데(식각), 이 후 지워야 할 부분을 깨끗하게 지우는 공정) 을 포함한 각종 반도체 공정 기기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에요.
원래는 삼성반도체 옆에 동탄에 있었는데, 24년 초에 판교 신사옥으로 이전했습니다. 사실상 이 컬처덱은 '신사옥 이전'을 기점으로 하여 널리널리 전파하려고 타이밍을 맞추던 중이었죠. 그리고 저는 20주를 보유한 개미투자자입니다. (존버중) *중요한 포인트
PSK와의 프로젝트는 3개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TF는 팀장님과 그룹장님, 수지님 이렇게 3명이었어요. 이 캐릭터가 참 재미있었어요.
일단 (팀장님이 그룹장님보다 윗직급입니다.) 팀장님은 영어권에 더 익숙해요. 사고방식도 언어를 바라보는 해석방식도 영어적으로 바라보시더라고요. 그리고 엄청 직관적이고 명확한 팀장님만의 언어원칙이 있으셨어요. 그럼에도 뭔가 열린 마인드...완전 신기했어요. 좋다 / 별로다 / 뭐지? / 이상해 / 괜찮아 / 훌륭해! 이런 표현이 딱딱 떨어지는 느낌
그룹장님도 언어영역 최고급 인재셨어요. 분명 1등급이셨을 듯. 이 단어와 저 단어의 차이를 간파해낼 줄 알고, 무엇보다 PSK내부에서 통용되는 단어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특히 그룹장님과 팀장님과의 티키타카를 바라보는 재미가 흥미진진했습니다. (물론 팀바팀이겠지만, 이 TF는 진짜 수평적인 문화였음)
수지님은 상대적으로 현실적이었어요. 사소한 문제로 논재잉 뜨거워질 때쯤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역할이었죠. “다 좋은데 그걸 사람들이 알아듣겠는가.” 라는 '궁극적이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역할이었죠.
이 세 명이 모여서 매 미팅 때마다 논쟁을 벌이는데, 원래는 1시간으로 잡고 만났지만 매번 4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나는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팀장님이 말하고 그룹장님이 반박하고 수지님이 멈추고 제가 정리하고
그룹장님이 말하고 팀장님이 반박하고 수지님이 멈추고 제가 정리하고
제가 말하고 팀장님이 의문을 던지고 그룹장님이 반박하고 수지님이 마무리하고
수지님이 말하고 그룹장님이 반박하고 팀장님이 옹호하고 제가 정리하고
흥미진진 그 잡채.
심리스가 유니클로 속옷 기능이냐, 정보 공유를 의미하냐
큐리어시티가 호기심말고 본질을 의미할 수 있냐 없냐
정보와 데이터와 지식과 음모론은 뭐가 다르냐
세상을 만든다고 할지, 인류를 위한다고 할지
세세한 단어 하나도 나중에 해석의 큰 차이가 생길 수 있어서 하나하나 겁나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간 것이죠.
과자를 놔두고 아무도 먹을 시간이 없는 진풍경... 미팅 끝나면 쿠팡 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하고 나온 기분.. 아...뭔가 뿌듯하고 상쾌했음
그렇다고 또 매번 빙빙 돈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이 뜨거웠지만 놀랍게도 앞으로 나아가는 논쟁이었어요. 이게 가장 힘든 경우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데 모르겠다.’ 라는 코멘트거든요. 앗싸리 이건 좋다, 이건 바꾸자! 뭔가 명확해야 함께 만드는 입장에서 방향성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거든요. PSK멤버들은 그런 면에서 극강의 엘리트 팀이었어요. 기다 아니다가 명확하고, 미팅 때마다 아젠다가 딱딱 정리되어 있었죠. 그 과제를 하나하나 뿌셔나가는데 던전 퀘스트 깨는 기분이 꽤나 상쾌했습니다. 미팅 갔을 때가 엄청 추운 겨울이었는데, 끝나고 나오면 머리에서 김나올 정도로 치열했음.
추후에 수식어 정리할 때도,
정말 칼같이. 팍! 팍! 이건 뺀다! 이런 단어 쓰지말자!
그리고 진짜 딱 원페이지로 만들자고 하셔서 그게 더 놀라웠어요. 보통 저희가 ‘컬처덱의 페이지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대부분 기업에선 ‘두께감’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런 주의였죠. 사실 이건 대담하고 용기있는 발상이거든요.
후속을 잘 만들면 된다. 그래서 진짜 후속프로그램들을 연결해서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리더님들을 대상으로 한 디렉션과 피드백 훈련이었어요. 저희는 언어를 다루기 때문에 후속 프로그램도 모두 언어와 관련된 것들이거든요.
워크샵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유형분석을 했습니다. PSK에는 총 5개의 행동원칙이 있어요. 그 중 글로벌마인드를 제외한 나머지 4가지. 전문가형, 데이터중심형, 소통중심형, 호기심추구형으로 나누어 각 유형별 7개의 문항을 설계합니다.
총 28개의 문항을 랜덤으로 섞고, 서베이를 진행해요.
서베이 결과를 받고, 다시 문항별로 정리한 후 점수를 계산하면 각 핵심가치 중 어떤 부분을 수호하는 리더인지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죠. 물론 재미로 진행한 서베이였지만 무척 흥미진진해 하셨어요. 더불어, 실제로 나온 결과도 꽤나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죠.
회사의 특성상 전문가와 데이터 중심형이 주를 이루었어요. 소통형과 호기심추구형은 소수였죠. 그러나, 재미있는건 소수였던 두 가지 유형의 리더들은다른 유형과 대비하여 ‘압도적인’ 점수차를 보인 경우가 많았어요. 소수지만 색깔은 명확했다는 얘기죠. 중간에서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계신다는 의미이기도 했어요.
본격적인 워크샵에서는 가상의 상황과 인물들을 제시하고, 해당 구성원에게 가장 적합한 피드백과 디렉션을 내리는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디렉션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방식이었죠.
리더님들은 각자 디렉션이나 피드백 문구를 적고, 육성으로 나누며 ‘이해가 되는지, 마음이 움직이는지’ 서로 피드백해주기 시작했어요.
사실 기술기업이고,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런 워크샵은 꽤나 정적이고 묵직한 느낌인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나, PSK의 리더님들은 엄청 유쾌하셨어요. 처음에 가졌던 고민은 기우에 불과했어요. 이 분들 3시간 내내 초 집중해서 의견을 나누시더라고요. 게다가 ‘손으로 적는’ 워크샵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모든 칸을 빼곡하게 채우는 성실함(?)까지… 뭔가 저희가 진행하긴 했지만 무척 감동받은 시간이었습니다.
리더님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이틀에 걸쳐 4시간씩 진행을 완료했습니다. 아 맞다…진행시간이 아침 8시부터였거든요. 완전 갓생러들. 출근하자마자 눈 퉁퉁 부어있는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했는데… 뭔가 이미 익숙한 듯한 활기참은 무엇일까요.
컬처덱도 만들어졌고, 리더들의 버벌 트레이닝도 끝났습니다. 그 이후엔 무엇이 진행됐을까요. 저희 역할은 여기서 끝났어요. 아주 최근 수지님께 연락드려보니, 지속적인 교육과 실제 제도까지의 연결을 진행중이라고 하셨어요. 다양한 캠페인도 벌이고 있는 중이었죠. 컬처덱이 후속작업으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죠. 최근 주가가 떨어져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존버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PSK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건, ‘자부심’이었어요. 이미 ‘나는 스마트하다!’ 라는 마인드가 사람들에게 장착된 느낌이었죠. 무언가 진행을 요청드렸을 때, 머뭇거림이 없었고, 소통은 깔끔했달까요.
‘조직 차원의 지원’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건, 실제 구성원분들의 능력과 더불어 ‘조직 차원의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TF팀이 완벽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건, 팀장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의사결정권자와 직접 소통할 만큼의 결정권한이 있었고, 또 이 프로젝트를 몹시 중요하게 생각하셨거든요. 또 그룹장님의 입김도 있었어요. 주변 분들에게 이 중요성을 전파하고 설득할 만큼의 화력이 있었달까요.
무엇보다 애당초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TF만의 것이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무게를 싣고 있었던 거죠.컬처덱이 만들어지고 난 후, 조직 차원에서 ‘공표’ 하고 리더들의 참여를 종용할 만큼 강한 드라이브가 있었어요. 그래야 성공적으로 랜딩이 가능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저희가 제작한 컬처덱 중 가장 심플하고 단순한 형태의 결과물이었지만, 페이지수와 무관하게 결국 그 문서의 무게는 조직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 두께에 집착하지 마세요. 컬처덱에 실릴 무게감에 집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