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의 삶이 끝나갈 때
일본의 현재 노인 복지 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요양 서비스의 두 가지 목적은 노인들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과 "잔존 기능의 유지"다. 이 두 가지를 삶의 끝에 이르기까지 케어해주는 것이 최근까지 정립된 노인 요양의 본질적인 목표인 것이다.
지난주에 회사에서 진행 중인 사업에 관련해서, 사회복지 컨설팅 회사 한 곳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역시나 그냥 명함만 컨설팅이라고 내 건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정보를 조사 분석해온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니 배우는 부분이 많아 퀄리티가 투자한 시간 대비 높았다.
한국보다 5~10년가량 노인 복지에 관련된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서 있는 일본의 이야기와 유럽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들을 전달받았다.
노인들에게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건강의 "개선"이나 "향상", "재활"이라는 명시적인 목적들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인들의 건강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일본의 현재 노인 복지 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요양 서비스의 두 가지 목적은 노인들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과 "잔존 기능의 유지"다. 이 두 가지를 삶의 끝에 이르기까지 케어해주는 것이 최근까지 정립된 노인 요양의 본질적인 목표다.
그전까지 공부해오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을 때 혼동되었던 개념이 하나로 통합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결국 노인에게 이 사회가 제공해야 할 것은 "노인 각자의 자기 존엄성과 잔존 기능으로서의 체력과 건강을 최대한 오랫동안 생의 끝날이 올 때까지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잘 되고 나니 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앞으로 부옇게 떠있던 안개가 걷히고 좀 더 뚜렷한 시계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아 추진하는 사업에 대한 의욕이 높아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자본주의자"답게 그분의 집안에서 갑작스럽게 나올지도 모르는 치료비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충돌을 피하고 피하고 피한다. 나는 그분의 존엄성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케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다른 생각보다 순수하게 경제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 이렇게 한번 실제의 삶 속에서 나는 그 두 가지의 노인 요양의 목적을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추구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니, 아래와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한국적 노인 케어에는 노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케어가 "존엄 케어"의 영역에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누구든 지금의 자신의 나이보다 2~30년 이상 많은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 이른바 세대 차이를 느낀다. 긍정적인 쪽이던 부정적인 쪽이던 많은 면에서 다르다. 그래서 보통은 정말 필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매우 연장자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일종의 불편한 기류가 감돌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존경스러움이나 연민 같은 감정이 생기기도 하는 반면. 불편함도 피할 수가 없다.
그래도 정치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면 나와 그분과의 사이에 불편함이 굳이 끼어들 이유는 없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와 젊은이에 대한 이해가 약간씩 오간다면, 유교의 영향력이 아직도 있는 이 나라에서 젊은이가 조금만 더 양보하면서 노인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데에 큰 문제는 없다.
충분히 깨달은 것은 나도 결국에는 그분들처럼 노인세대에 언젠가는 접어들 것이고, 생각의 폭을 그 나이가 되어서도 넓힐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섣불리 그분들을 유형화하고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 내가 나중에 그런 일을 당해도 견딜 수 있을게 아니라면.
단기적인 기억력이 쇠퇴할 것이고, 독서를 밤새워서라도 몇 번이나 할 수 있었던 젊은 시기를 놓친 지금, 생각하는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곤 하는데, 60-70에 이를 때쯤이면, 2~40대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이해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임을 안다.
더구나 기사라든가 정보를 매일매일 얻는 주변의 사람들이 항상 한정되어 있고, 그 사람들이나 정보 매체가 가진 성향들도 나와 그 나이 든 분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수십 년간 같은 방식과 관점으로 설명하는 내용들을 들어왔고,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이 정보와 지식화 된 내용들을 일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내용을 인정하는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힘들어진다. 당연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불편함을 끼칠만한 상황이 찾아오기 전까지 좋은 느낌으로 대화하던 노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쯤에는 일종의 어색함을 넘어선 막막함을 느끼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종북이지, 자네도 마찬가지고". 어떤 과정이 이런 사고방식을 낳았는지는 대략 짐작이 되지만 섣불리 결론을 짓고 싶지는 않다.
"종북"이 이 나라의 절반 이상의 국민들이고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붕괴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인데, 참으로 미스터리한 이야기다. 그래도 대한민국 경제가 아직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기적 아닌가?
나는 태어난 이후 줄곧 북한과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할 이유는 "통합에 따른 규모의 경제 효과"를 통해서 더 부강한 나라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고, 현재 지정학적으로 처해 있는 정치적인 불안정성과 사회적 불안감을 없앨 수 있는, 말 그대로의 먹고살 길이 더 많아질 수 있다는 소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에서 줄기차게 써서 말랑말랑했던 내 머리에 매일매일 입력시켰던 내용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내게 던져진 "종북"이라는 카테고리를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삶에 균열이 생길 정도의 자존심과 자신감, 건강 상태의 붕괴가 예상될 정도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생각이 있건 없건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은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는 것이 가히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도 대항이라도 하듯이 "수구꼴통"이라는 딱지를 붙일 이유도 솔직히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그분이 말하는 "종북"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듯이 그분도 내가 말하는 "수구꼴통"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어느 쪽으로도 삐져나올게 없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나 같은 사람들이 "종북"이라면 내 생각에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자유국가가 이미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나 앞으로나 민주주의 자유국가라는 형식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확대될 것이다. 이미,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거의 폐기된 개념으로 전 세계의 아주 희소한 몇 개 국가에서 존재하는 개념이며,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마저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개방노선"을 걸어가고 있다. 북한 못지않았던 공산주의 국가들인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미얀마"마저도 열심히 자본주의 개방노선을 통해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철 지난 "공산주의"를 사회 이념으로 지속시키고 경제적으로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고 있는 나라인 "북한"을 진지하게 따르고자 하는 "종북"이라고 적지 않은 젊은 사람들에게 딱지를 붙이고 있다니? 소수의 권력을 독점한 체제 내 기득권들이 자기들만의 호화로운 삶을 위해 다수의 주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그런 국가를 쫓아가겠다는 생각을 한다라니? 정말 누구를 금치산자나 최소한의 경제적 관념도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분도 젊은 "종북"으로부터 용돈을 받고 계시거나 노동력을 제공받아 생활을 영위하고 계시며, 비슷한 화제에는 웃음을 보이고, 비슷한 취향에는 동감하신다. 어느새 머리에서 잠시 "종북"에 대한 적대감 프로그램이 잠시 작동을 멈춘 것처럼. 그 잠깐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서로 얼굴 붉힐만한 일들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대로 Give and Take를 하며 지낸다.
내 마음속에서도 미움이 싹트기보다는 그것이 당신의 "존엄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고방식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이 분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종북"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사람들 모두가 정말 잘못 생각을 해온 것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이 전달되어도 이것은 그분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고, 만약 바꾸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충격이라면 그분들의 "존엄성", 자신과 어리석은 대중들을 가르는 위계에 근거한 자신감이나 자존심이 붕괴되고, 어쩌면 건강에도 엄청난 피해가 끼쳐질지도 모른다.
나 역시 구구절절이 이 분과 갑론을박을 하는 것보다는 건강에 위해가 가지 않을 수준으로 최대한 내 의견을 감추고 맞장구를 치면서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에 "자본주의자"답게 그분의 집안에서 갑작스럽게 나올지도 모르는 치료비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충돌을 피하고 피하고 피한다. 그분의 존엄성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케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다른 생각보다 순수하게 경제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있다.
왜냐면 그 생각은 정말 조악하고 영문도 모르고 한대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 들게 될 정도로 악의적으로 누군가 만들어 그분의 머리 속에 들어가 박힌 생각이지만 그분의 존엄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미덕으로서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 과거를 보다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왔고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매우 좋은 동기와 결합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분도 인정해야 할 것은 나와 같은 또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 또한 자신들의 존엄과 더불어 있는 것이고, 동기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꼭 설득해서 알려주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의 생각은 이제 사라져가는 잔존가치라고도 불릴 수 있는 노인의 사그라져 가는 에너지와 건강의 원천이며,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노인이 남아 있는 짧은 삶 속에서 자신의 올바른 동기를 어떻게 존중받고 살아온 인생을 돌아봤을 때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는 나름의 행복한 결론에 도달하냐는 것이다. 그 생각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
피 튀기며 싸우고 논쟁하거나 토론을 해야 할 대상은 아직도 좀 더 존엄한 삶을 만들어갈 에너지가 넘치는, 그분들보다는, 젊은 사람들이다. 왜냐면 그들의 가치는 깨어지고 부서진 뒤에 다시 더 나아지고 향상되며, 이 사회를 위해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고양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있어도 할 수 있을 사적이거나 공적인 일이나 놀이거리를 갖고 있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시대"를 앞당겨야만 한다는 마음의 소리는 다른 어떤 정보나 지식보다는 이 가사로부터 들려온다.
신해철 님의 "50년 후의 내 모습"이라는 노래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중에 머리 속에서 자꾸 재생되고 있었다. 비록 신해철 님은 20대에 불렀던 이 노래 가사와도 같이 50년 후의 자신의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일찍 삶을 마감하였지만. "벤치에 앉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긴 정말 싫어"라는 처절한 가사는 처음 들었던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내 머리 속에서 울리고 있다.
대다수의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있어도 할 수 있을 사적이거나 공적인 일이나 놀이거리를 갖고 있고, 시간을 마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시대"를 앞당겨야만 한다는 마음의 소리는 다른 어떤 정보나 지식보다는 이 가사로부터 들려온다.
어떤 정치적 진영에 자신을 위치시켰던, 일단 우리는 노인의 다른 생각과 목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저물어 가는 그들의 삶에 마지막 존엄이 살아있는 일상이 최대한 지속되도록 노력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나이 들어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우리에게도 젊은이들이 귀를 열어주고 최소한의 존엄은 인정해줄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하고 있다면 적어도.
그렇게 되었을 때 어쩌면, 이 분도 우리의 동기가 최소한 같은 방향을 향해 열려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 희미한 단서라도 스러저 가는 기억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