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reedom plu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 Jul 30. 2016

<브로드웨이 42번가>-지인 드립

친구인 뮤지컬 배우 박동하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브로드웨이 42번가

출연 박상원, 박해미, 바다, 김법래, 이정화 기간 2010.09.29(수) ~ 2010.11.21(일)


지인 드립이라는 표현을

글에 담게 된 것은

웹상을 떠돌다가

한 연예인에 대한 성토대회가

극단을 향해 치솟을 때

이 표현을 배운 탓이다.


누군가 유명해졌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알고 있다,

걔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되었다, 현재 보이는

이미지와 그의 본질은 다르다

등등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일면 광분하는 모습들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상의 한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위의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출연한 배우 중에 박상원 씨는

어렸을 때 살았던 아파트의

내가 살던 집보다는 넓었던

동에 살았던 이른바 옆 동네

아저씨였고, 두 번째, 출연자

명단에서 이름이 빠져나와 있는

박동하는 학창 시절에 알았고

지금도 알고 지내는 친구이다.


최근에는 다른 배우로 교체가 되었지만, 한 때 브로드웨이 42번가 공연의 붙박이였다.

박동하 / 뮤지컬 배우

출생 1974년 06월 28일

신체 키 179cm

데뷔 1984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학력 중앙대학교 무용과

경력 2001년 일본 극단 '사계' 입단 2003년 일본 소속사 도호

수상 2009년 제15회 한국 뮤지컬 대상 시상식 남우신인상

주요작 브로드웨이 42번가 - 대전, 브로드웨이 42번가 - 고양, 김종욱 찾기, 브로드웨이 42번가 


특이한 경력 사항이 덧붙여 있는데,

이 친구는 한창 줏가를 올리던

2000년대 초반 갑작스럽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뮤지컬계를 혈혈단신으로

노크하여 결국에는

일본 뮤지컬 계에서

"한류"바람이란 것을

진작에 일으켰던

뮤지컬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에

그마저도 훌훌 털어버리더니

2007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이른바 변화무쌍한 삶 속에

자기 자신을 던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최근의 근황으로서는

단국대와 명지전문대 초빙교수로서

뮤지컬 전공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중합작 드라마 "임진전쟁 1592"에

'고니시'역으로 출연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58822267879370&id=138134346614829


하나 언론에 잘 나타나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다면,

이 친구는 학창 시절에

이미 일본 뮤지컬계에

진출하기 위해서

일본어를 열심히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일본에 가서 독학으로 공부했던

일본어가 그다지 잘 통하지 않았음에도

결국에는 이를 극복하고

외국인으로서 이룬 성과는

박수를 쳐줄만한 부분이다.

그는 일본인 뮤지컬 배우들도

맡기 힘든 몇개의 유명 뮤지컬들의

주연 또는 주요 조연을 맡았다.

"루돌프 황태자의 첫사랑"과

"불새" 등, 적어도 극중의 일본어는

통달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배역들을 소화해냈다.

한일 합작 영화 중에도

"피안도"와 "무명인"에 출연했다.


박동하는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

본명이 일본인들에게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었던바 지은 예명이고

왠지 모르게 이 이름 자체가

더더욱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이름만 대어도 누구나 알정도의

인지도를 우리나라에서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소식을 듣고,

공연을 보러 가고, 가끔 만나

저녁이라도 한두 번 하는 것이

나 같은 생활인에게는

기쁨 중에 하나이다.


겸손하고, 진심이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 만남의 시간은 매우 소중하다.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삶의 나침반이며

내 이야기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화려한 광고와 비주얼을

몇 번씩 스치면서

언젠가는 가서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와이프와 함께

롯데 시어터의 공연을 보러 갔었다.


학교에 있을 때에도 이 친구가

단장으로서 몸담았던

동아리의 이름이 브로드웨이였던 바

이 공연과 이 친구는 나름 일체화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건 뭐 소설도 아니고 인생이

그런 식으로 가고 있는 셈이었다.


그냥 잡담을 하면서 가끔

얼굴 마주칠 때와

역시 공연에 임하고 있을 때의

이 친구의 모습은 천지차이다.


나는 이렇게 스케일이 큰

뮤지컬 공연을 명성황후 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명성황후에 깔려 있는

그 무거운 느낌과는 달리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즐겁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춤과 노래의 향연은

공연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음에도

한눈팔 수 있는 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일부분 동일시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나에게는 생기기 때문에,

마치 공연장에 서 있는 그 친구가

내가 되기라도 한양 매 출연 분마다

가슴 조마조마하게

그 친구의 퍼포먼스를

세세히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은 안쪽으로 굽게 된다고,

1. 나는 그 친구가 극의 분위기를

알게 모르게 이끌고 있다는 느낌을

내내 받았다.

2. 출연자로서의 그는 같이 출연하는

사람들과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색채를 잘 내보였다.

3. 훨씬 젊고 박력 넘치는 배우들도

그 공연에 같이 있었을 터인데,

활력이 최고조로 달하고 있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였다.


자기 꿈을 향해 투신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강한 활력과 느낌,

분위기. 청중을 이 분위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이른바 매력적인 연기.

이 모든 것들이 그가 브로드웨이

42번가를 공연할 때마다

붙박이로 출연할 수밖에 없었던

정확한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랑스러운 친구라고

선뜻 부를 수가 있었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존경스러워졌다.


나도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런 감탄사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남을 정도였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은 공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의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 비즈니스도 이른바

비유적으로는 무대라고 불릴 수 있고,

이 무대에서 나는 그 친구가 보여주는

것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어야

나름 자랑스러운 또 하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극은 실수를 가장한 해프닝들이

군데군데 잘 배치되어 있다.

청중들이 지루해할 새가 없을 정도로

이 해프닝들은 자주 벌어진다.

심리의 속도와 심리가 변화하는

낌새를 민감하게 잘 감잡고 있는

훌륭한 연출가와 이 박자를 놓치지 않는

배우들의 기민한 연기력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하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대량의 자원이 이 공연에 투여되고

있음에도 이러한 해프닝의 배치는

이 뮤지컬이 갖고 있는 무게감을

떨어뜨리면서도 청중들의 주의를

더 무게감 있게 무대로 흡수하고 있다.

 
이 공연에서 박상원 씨의 열연은

유감스럽게도 볼 수 없었지만,

김법래 씨의 출중한 발성을 무기로 한

연기력과 가창력은 극의 무게가

떨어지는 순간 균형감을 맞추듯이

떠오른 극을 지그시 눌러준다.

 
박해미 씨의 온몸을 내던지는 연기는

비록 그 배우가 맡은 극에서의

역할의 한계로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박해미 씨가 아니고는 그 역할에 걸맞은

다른 중량급의 여성 연기자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극에 철저하게 결합되어 있다.

 
바다 씨의 연기는 귀여움을 가득히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전문 뮤지컬 배우가 아님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해서

'천재'적인 뮤지컬 배우를 연기했을지를

절절히 체감하게 만들어준다.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 같다.


그리고 눈부신 조연 배우들의 연기와

한치의 불일치도 의도하지 않은 이상은

일으키지 않는 철저한 모든 배우들의

혼성 일체 된 연기는 공연의 질을

한없이 높은 수준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의 공연이 끝날 때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갖게 되는

자기 반영의 확장은 크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얻는

자기 반영의 확장은

아름답다.


이전투구하고 남을 뒤에서 욕하고

모함해서 얻는 자기 반영의 확장과는

차이가 있다.


나는 이전의 몇 가지 글에서

전략을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이 공연을 열심히 보고 나니

이야기했던 전략이라는 개념이

매우 치졸한 개념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물론, 뮤지컬계에서도

정치적인 게임은 상존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 게임을 벗어난 순간이

매번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무대라는 것만큼은 동의해야 할 것 같다.


나도 이제 내 무대에서 열심히

탭댄스 비스무리 한 것을 추면서

성과를 남겨야 하겠기에 이만 글을 줄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엄성과 잔존기능 유지>-50년 후의 내 모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