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
출사표를 읽다 뇌리에 스친 한 문장.
“승상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만일 그 아이가 그만한 재능이 있지 않거든 승상께서 성도의 주인이 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절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이옵니다.”
오랜 역사를 살펴보아도, 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아들을 대신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그들 사이에는 분명 무언가 특별한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융중대’ 솥의 세 다리가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열세인 유비의 세력이 독립된 주체로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3세기 중국의 중심지는 중국 문명이 탄생한 황하 유역이었으며, 이 지역이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자 인구와 생산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우리는 적벽대전이 중국의 패권을 다툰 싸움으로 오해하지만, 이미 중원의 주인은 관도에서 정해졌다. 불리한 정세 속에서 제갈량이 세상에 일어섰을 땐 아마 한 고조의 역사를 재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일들은 인간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파악할 때, 구조적인 인과관계로 흘러갔는지, 개별적인 역동성의 흐름인지 명쾌하게 하나의 답을 내기 어렵다. 그에게 있어 촉의 악재들은 아마 스스로도 소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법정이 죽지 않았다면, 유비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한탄하던 제갈량.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았지만 오랜 친우들을 한순간에 잃은 그의 분노를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평생을 거대한 제후들 사이에서 인내하다 최후의 불꽃을 체현한 후 죽어가는 유비에게 아들을 부탁받은 탁고대신인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이 보필해야 할 황제는 아직 17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어린 황제를 보다 현실로 눈을 돌리면, 유비의 죽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위의 침공, 출신성분에 따른 파벌싸움. 제갈량에게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었다.
유비를 따라나선 지 딱 20년이 되던 해. 그는 출사표를 올린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는 더 이상 남양의 젊은 선비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늙어간다는 건 곧 ‘가능성’이 줄어간다는 말이다. 노력한 양에 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줄어들고 막연한 가능성으로 둔갑해 있던 꿈들의 실체가 뚜렷해진다. 20년의 세월 동안 유비와 함께 고대했던 한 왕실의 부흥이라는 그의 꿈은 출사표를 던질 때의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었을까.
화약의 발명은 인류의 전쟁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칼 한번 잡아본 적 없는 평범한 농민도, 방아쇠만 누르면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의 병사를 죽일 수 있었으니까. 이 말은 역으로, 화약의 발명 이전에는 모든 무기가 냉병기였고,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살상력이 천차만별이었다. 기본적으로 무기를 휘두를 근력을 기르고 도식들을 훈련하며 발 빠르게 진법을 수행할 역량을 갖추려면 오랜 기간을 육성해야 한다. 오늘날 기초군사훈련의 기간인 6주 정도로는 병력으로 쓸 수 없다. 그만큼 고대의 전쟁에는 ‘정예병’의 수가 중요했다.
소국이 대국을 치는 전쟁에서 가장 어려움은 이런 부분이다. 몇 년을 키워놓은 정예병을 한순간의 실수로 잃는다면 그 뒤에 다시 육성하고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기간이 걸린다. 또한 이들을 지휘할 능력 있는 장수는 이릉에서 너무 많이 죽거나 어쩔 수 없이 투항했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기다릴 수 없었다. 시간은 한순간도 그의 편인 적이 없었으니까.
사마의는 사신에게 제갈량의 일과를 듣고, 식소사번(食少事煩)하는 그가 단명할 것을 예측했다고 한다. 실제 제갈량의 주부인 양옹은 나라의 승상인 그가 문서를 하나하나 교정하는 것을 보고 한나라의 승상 진평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며 ‘위분지체’의 중요성에 대해 충고해 제갈량이 그 말에 감사했다고 한다. 혹자는 제갈량을 두고 통치의 체계를 모른다고 말하고, 혹자는 남을 믿지 못해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나는 친우 서서 가 위에서 중히 쓰이지 못함을 듣고 적국의 광활함에 탄식한 그를 보면 그 여유 없음에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그는 매 순간 누구보다 초조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좋다. 어려운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항상 나아가며 실패할 때마다 발전하는 그의 생애가 너무나도 눈부시다. ‘선善 이 작다고 불행不行하지 말고 악惡 이 작다고 행行하지 말 것’ 어쩌면 유비의 유언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건 제갈량이지 않았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실 우리 모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다. 노력하고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미혹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항상 정진하며 노력하는 것. 수천 년 전부터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정말 어려운 건 알아도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름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이천 년 후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 이토록 회자되는 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20대 청년의 자신을 알아보고, 47세의 유비가 세 번 찾아온 것을 기억하며, 끝까지 충성을 다한 것. 악재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펼친 것,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사는 것.
좋은 재료가 준비되어 있을 때에 완벽한 요리를 하는 요리사도 훌륭하지만,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로 최선의 요리를 내어놓는 요리사가 왠지 모르게 더 끌린다. 제갈량의 출사표에는 그의 최선과 진심이 담겨있기에, 감동이 있는 것 아닐까
지금도 중국에서는 출사표의 전문을 학습자료로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한자의 문법 사용이 간결하고 그 뜻이 수려하다. 다른 걸 차치하고, 수천 년간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