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스탠리, <이웃집 백만장자>
10년 전, 자동차를 한 대 뽑았습니다. K3였죠. 취등록세까지 해서 2000만 원 정도 했습니다. 저경력 교사가 구매하기엔 약간 부담되는 금액이었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긴 지방 소도시거든요. 대중교통이 촘촘한 수도권과는 얘기가 다릅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늙은 만큼 그 녀석도 나이가 들었네요. 누적 주행거리 18만 km를 앞두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털털거리고 삐그덕 대지만, 그래도 잘 달리고 잘 서줍니다. 자동차가 해야 할 기본 퍼포먼스는 꾸준히 보여주네요.
물론 그 10년 동안 저만 나이를 먹은 건 아닙니다. 대학 친구들도 나이를 먹었죠. 그 친구들이 처음 샀던 차도 다들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지방 소도시에서 자동차는 선택이 아니라 거의 필수입니다. 지하철은 당연히 없고, 버스는 배차간격이 너무 커요. 그래서 대부분 발령받고 얼마 안 되어 차를 장만합니다. 학교 주위에 자취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죠.
얼마 전, 대학 친구 한 명이 청첩장을 돌렸습니다. 자기 집으로 초대했죠. 다들 전국 각지에서 집결했습니다. 누구는 인천에서, 누구는 세종에서, 누구는 경남에서 모였죠. 그렇게 경북 구미의 신축 아파트에 모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자취방에서 모였을 사람들이, 이번에는 아파트에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다들 어두운 곳으로 향하네요? 바로 지하주차장입니다. 아니, 이 친구들이 왜 다들 그리로 갈까요?
"삐빅"
다들 스마트키를 눌러댑니다. 자기가 이번에 뽑은 차를 자랑합니다. 제네시스 g80, gv70, 전기차 ev6 등 종류도 다양합니다. 차 문을 여니 새 차 특유의 냄새가 확 풍깁니다. 그리운 냄새입니다. 저도 10년 전에 맡아봤던 그 향기로운 접착제(?) 냄새죠.
제 차는 아니지만, 허락을 받아 핸들도 만져 봅니다. 괜히 비상 깜빡이도 눌러보죠. 딸깍딸깍 거리는 소리마저 고급스럽습니다. 라이트는 얼마나 부드럽게 들어오는지, 외제차 저리 가라네요.
다행히(?) 제 K3는 이곳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 차는 이제 더 이상 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육아휴직이 끝난 뒤, 아내가 출퇴근용으로 사용하고 있죠. 다행히 저도 버스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으로 인사이동을 했습니다. 덕분에 뚜벅뚜벅 뚜벅이가 될 수 있었죠!
뚜벅이 생활, 은근히 좋습니다. 먼저, 운전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직업 특성상 어린이 보호구역을 무조건 지나쳐야 합니다. 당연한 일이죠. 초등학교에서 일하니까요. 이곳에서는 횡단보도에 사람이 없어도 무조건 정지해야 합니다. 불법 주정차 차량이라도 있으면 신경이 더 곤두섭니다. 만약 실수로 학생에게 피해를 준다면?
"00시 근무 초등교사, 본인 근무지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초등학생을 차로 치여 충격!"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정말 굼벵이처럼 기어갑니다. 운전할 때는 정말 주의하죠. 하지만 버스 타면 이런 거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장점은 또 있습니다. 두 손이 자유롭다는 거죠. 운전대를 잡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도 되고, 신문을 봐도 됩니다. 원격으로 일을 처리할 때도 있습니다.
시간 맞추기가 힘든 거 아니냐고요? 카카오맵만 있으면 걱정 없습니다. 예상 도착 시각이 분초 단위로 표현돼요. 급똥만 아니면 버스 놓칠 일이 없습니다. 물론 한 번 놓치면 45분을 기다려야 하기에, 아침 6시 40분에 집에서 나서야 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을 하면 행복하죠. 덕분에 아침형 인간, 미라클 모닝을 반 강제로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버스 타는 게 더 좋다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차 몰고 출근하는 게 좋죠. 누군가 저에게 공짜로 차를 선물해 준다면 당연히 받을 겁니다. 여름에 땀에 쩔 일도 없고(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언덕에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양말이 홀딱 젖을 일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주말에 출근할 때면 아내에게 꼭 물어봅니다. "여보, 오늘은 내가 차 타고 출근해도 돼?"
양말이 쫄딱 젖은 날, 땀(육수)까지 줄줄 내고 나면 현타가 옵니다. 버스 안에서 차 가격을 검색해 보죠. 먼저 그때 봤던 친구들 차 가격을 알아봅니다. g80, gv70, ev6... 얼마일까요? 어후, 일단 6천만 원부터 시작하네요. 제 연봉보다 높은, 귀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옵션을 좀 더 찍어볼까요? 세상에, 저 세상 가격이 되어버리는데요?
제네시스나 전기차는 패쓰하고, 제가 타고 있는 K3를 검색해 봅니다. 옵션을 비슷하게 넣으니 3천만 원이 나오네요. 10년 사이에 새 차 기준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첨단 옵션이 많이 들어갔겠지만, 인플레이션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곳이 없네요.
조용히 뒤로 가기 키를 누릅니다. 그리고 다시 감사함을 느낍니다. 1,450원에(1,450만원 아님 주의) 이 큰 차를 탈 수 있다니! 버스 정말 합리적인 걸요? 휘발유 1리터도 안 되는 가격으로 이렇게 긴 거리를 갈 수 있습니다. 대중교통 만쉐!
이 책, <이웃집 백만장자>를 한 낱말로 요약하자면? '소비통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절약은 기본이래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거든요. 소비재에 쓰는 돈 아껴서 자산에 쓰라는 말을요. 특히나 '자동차'에는 더더욱 돈 많이 쓰지 말랍니다. 백만장자들도 그렇게 한대요. 본인이 가진 것에 비해 검소한 차를 몬답니다.(물론 대다수가 보기에는 그것도 충분히 좋은 차겠지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차 살 때 돈을 2배로 쓴다고 해서, 효용성이 2배로 늘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 K3는 4시간 걸리는데 그랜저는 2시간 걸린다면? 그땐 얘기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현실은요? 10분 차이도 안 날 것 같은 걸요?(띵동, 구간단속을 시작합니다)
어떤 차든, 대부분 비바람을 잘 막아줍니다. 에어컨과 히터도 잘 나와요. 잘 가고 잘 섭니다. 국산 브랜드 신차는 다들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게 2천만 원짜리 경차든, 6천만 원짜리 고급차든 간에요. 다만 그 차이는 있죠. 앰블럼 값이요.
앰블럼이 H냐, 날개냐, 동그라미 4개냐, T냐, 삼각뿔이냐.. 그것에 따라 가격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하차감의 영역이죠.
잘 모르지만, 가방 세계에도 그런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샤넬이니 에르메스니 하는 것들요. 그래도 걔네들은 가격 방어라도 되지 않나요? 샤넬 클래식백은 30년 뒤 딸에게 물려줘도 좋아한다던데요? 오늘 산 자동차를 30년 뒤 아들에게 물려준다면? 그 녀석이 좋아할까요?
집들이를 했던 그날, 구미로 올라갈 땐 기차를 탔지만 돌아올 때는 g80을 얻어 탔습니다. 어찌하다가 오른쪽 뒷자리, 소위 말하는 사장님 자리에 앉았죠.
솔직히, 그전까진 몰랐습니다. 승차감이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군요. 확실히 제 K3랑은 달랐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도 얼마나 조용한지, 공중에 떠가는 줄 알았어요. 4살짜리 제 딸이 차만 타면 토하는데, 그게 '멀미'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차 가격'때문이었을까요?(눈물이..) 2천만 원과 6천만 원의 차이, 하차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승차감도 다르긴 달랐습니다. 경험해 보니 알겠더군요.
주절주절 길게도 썼지만, 이건 다 변명이 맞습니다. 이웃집 백만장자 형님들이랑 제 상황은 완전히 다르죠. 그들은 돈이 있는 데도 '안 쓰는 것'이고, 저는 '못 쓰는 것'이니까요. 이게 어떻게 같겠어요.
제가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적어도 변인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 형님들처럼 백만장자가 된 뒤에, 그때도 그들처럼 검소한지 알아봐야죠. 분에 넘치는 차를 사는지, 아니면 합리적으로 구매하는지 말이죠. 그래야 지금 제가 하는 것들이 '정신승리'인지, '현실승리'인지 판명 납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진 선택지가 없습니다. bmw밖에 답이 없어요. 아, 여긴 지방 소도시니까 m(지하철;metro)은 빼겠습니다. 열심히 버스와 워크로 비벼 볼게요.
따르릉,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물음에
삐빅,
감사합니다로 답했습니다.
(-1,450원)
사진: Unsplash의Kevin Leht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