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전화하는 거, 스토킹입니다"

가해자의 민낯

by 윤서A

전세사기꾼의 사기죄를 다루는 형사재판 1심 선고일이 다가올 때까지도, 나는 '이변'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명백백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탄원서를 보내놓고 당일에 법정에 참석할 수 없어 결과만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기어코 뜻밖의 선고를 듣고 말았다. '사기죄 무죄, 배상명령신청서 기각'.

항소의 가능성을 남겨두긴 했지만, 조금 당황하고 황당했다. 어떻게 무죄일 수가 있지? 판결문을 읽으려 했지만 손이 떨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직 그의 파산을 다루는 회생 재판은 진행 중이고, 나를 비롯한 10여 명의 세입자들은 엄연히 국토교통부가 인정한 전세사기피해자들이었다. 법원에서 선고를 들었던 한 피해자가 단톡방에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놈(집주인)이 법정을 나오며 "ㅅㅂ 무죄다, 무죄"라고 이야기하곤 떠나는 것을 봤어요"라고 토해냈다. 피해자들 사이엔 다시 격랑이 일었다.




처음 전세사기를 인지했을 때만큼의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호흡이 가빠졌고, 지금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던 나는 집주인에게 오랜만에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간 목소리도 듣기 싫고, 답없는 소리도 듣기 싫어서 전화통화도 문자도 보낸 지 오래였다. 그는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그건 본인의 잘못이며 매월 조금씩이라도 입금하는 방식으로 평생에 걸쳐 전세금을 다 갚겠다고 했었다. 어리석게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그가 뱉은 말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세금 상환일자를 알려달라는, 다시 한 번 지금의 상황을 되짚는 수준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 '죄송합니다~'


글에는 그 사람의 감정이 담겨 있으나, 읽는 사람이 그걸 완벽히 이해하는 건 어렵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ㅋ의 개수나 ^^ 같은 기호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였지만, 오늘,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물결은 분명 이례적이었고 상당히 거슬린 게 사실이다. 마치 내 상황을 조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한참을 기다려도 다음 문자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주지 않겠단 뜻인가? 바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그는 받지 않았고, 나는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겠다는 오기가 발동해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열 번쯤 버튼을 눌렀을 무렵 마침내 연결음이 멈췄다.


"이렇게 자꾸 전화하면 스토킹인 거 모릅니까."

그의 첫마디. 술에 취한 목소리였고, 내 전화가 상당히 귀찮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전세사기꾼이 피해자에게 할 말은 단연코 아니었다. 화가 났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처음에 분명 매월 얼마라도 갚는다고 했는데,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상환 일정을 알 수 있을까요?

그는 잔뜩 취한 목소리로 딸꾹질과 함께 대답했다.

"법이 무죄라는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요?" 애석하게도 그는 1심이 내린 무죄 선고가 채무 탕감 선고라도 되는 듯 자신있게 받아쳤다.


참았던 분노가 터져나왔고, 동시에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무죄 받고 축하파티라도 하는 거냐며 적반하장이라고 소리지르는 나에게 그는 자신이 술을 먹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지르더니, 결국 육두문자를 내뱉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은 꺼져 있었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전화를 걸었을까. 전화가 끊기고 나서 나는 나를 자책했다. 전화를 건다고 뾰족한 수가 당장 나오지 않을텐데, 무슨 좋은 소리 들으려고 이 분노와 갑갑함을 자청했을까? 가해자에게 쌍욕을 들은 건 내 분노 포인트도 되지 못했다. 그럼 나는 내 전세금을 주지 않는 어떤 사기꾼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연락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나는 숨죽이며 분노와 슬픔을 삼키고, 그 사람은 무죄니 어쩔거라는 마인드로 술을 마셔도 되는 건가? 시간이 갈수록 피해자들은 짓눌리고, 그만큼 가해자는 가뿐해지는 이 상황이 너무나 어색했다.


나는 생면부지의 사람과 임대차 계약을 맺었고, 그 사람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았다. 전세금은 내가 청춘을 바쳐 모은 대부분의 재산이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가해자는 뉘우치기는커녕 피해자의 전화를 스토킹으로 치부한다. 그는 건물을 매입한 이후 다른 사람들의 전세금으로 자신의 생활비와 유흥비를 충당하며 대책없이 살았고,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임차인들에게는 전세금 반환이 어려울 수 있다는 어떤 고지도, 암시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들과 같은 건물에 지내다가 파산 신청을 하기 두달 전 은밀히 이사했고, 피해자들이 법원에서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도록 했다. 그리고 1심의 무죄가 마치 그의 모든 채무를 탕감해준 듯 행동한다. 이 모든 과정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10여 명의 삶을 짓누른 중범죄자를 피해자는 지켜봐야만 할까? 건물 경매는 반드시 첫회에 유찰될 것이다. 2회, 3회에도 낙찰된다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감정가 그대로 매매되지 않는 이상, 단 한 번만 유찰돼도 피해자들의 전세금 회수는 물건너간다. 이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며칠간 분노와 슬픔에 잠겨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거였다. 다루지 못한 쟁점을 다루기 위해 항소심(2심)이 진행될 것이고, 그때 나는 또 탄원서와 다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법원에 제출할 것이다. 나뿐 아니고 다른 피해자들도 그럴 것이다. 극악무도한 말과 뻔뻔한 얼굴을 마주하고 속앓이하는 게 피해자들일지라도, 뒤돌아서 포기할 수 없고 그대로 주저앉아 울기만 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당연한 일을 하는데도 심호흡이 필요할 만큼 심리적인 압박이 나를 짓누른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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