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지친다는 건
처음 전세사기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회수가 불확실해진 전세금 액수에 불안했고 집주인의 뻔뻔한 태도에 분노했다. 또 기다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 좌절했다. 매일 찾아오는 불안과 분노 좌절은 언제나 슬픔을 동반했다. 언제쯤 전세금을 회수할 수 있을까, 회수는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때 나를 삼킬 것만 같던 저 감정들도 1년쯤 반복하다 보니 아주 조금은 무뎌졌다. 그렇다고 훌훌 털고 일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러는 동안에도 바쁘게 일해야 했고 몸이 피곤하면 무리하지 않게 쉬기도 해야 했다. 마음속에 늘 커다란 짐을 지고 일상을 살다 보니, 슬슬 빨리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강해졌다. 전세금의 절반 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기를 인지하면서도, 또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그냥 이 모든 문제에게서 벗어나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새 출발은 전세금 회수가 관건이었고, 전세금을 회수하려면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집주인이 돈을 주던지, 아니면 이 건물의 매각 대금을 세입자들이 나눠갖는 일뿐이었다. 첫 번째는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두 번째 방법이 사실상 유일한데, 이건 전세금의 일부 손실을 감안해야 하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경매에서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팔릴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매각대금 중 일부는 최우선 변제금에 쓰인다. 나도 그중 하나니 천만다행이지만, 이후부터는 건물 담보빚 등 나보다 앞선 세금이나 빚을 그 돈으로 다 갚을 터였다. 그러고 남은 돈을 전세금의 비율대로 세입자들이 나눠 가진다. 하지만 다수의 부동산 전문가들과 내가 상담받은 변호사 세무사들은 안타깝게도 빚잔치가 끝나고 세입자들이 나눠 가질 수 있는 돈은 적다고 했다.
보통 건물이 넘어가면 실제 경매가 이뤄지기까지 최소 1년은 걸린다고 했다. 그나마 경매날짜가 잡히면, 시세보다 30% 정도 낮은 가격의 입찰가가 책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건물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유찰되면 2차 경매부터 또 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만약 원룸 건물을 소유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 구축 경매 건물을 찾고 있다면, 아주 좋은 입지와 시설로 누가 봐도 금방 채갈 것 같은 건물이 아닌 이상 2차 3차까지 기다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사이 건물 가격은 점점 떨어진다. 낙찰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다릴수록 이득이지만, 세입자들은 기다릴수록 전세금을 못 받을 확률이 커지는 잔혹한 자본주의 논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나마 건물을 살 사람이 있어야 그런 거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소리다.
어느 날 법원에서 경매 개시 안내문이 도착했다. 1년여 만에 드디어 경매 날짜가 잡힌 것이다. 지금부터 위 과정대로 경매가 진행될 거다. 부동산 경기와 전세사기 급증의 추세를 보면 당장 인수자가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마음 한편으로 어서 낙찰돼 차라리 돈을 잃더라도 이 일을 모두 잊고 새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그 돈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냥 나를 짓누르는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막상 손실이 현실화하면 지금보다 더 괴로울지 몰라도, 당장의 굴레를 벗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매우 지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를 좀먹는 이 문제에서 멀어져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1차 경매가 진행될 날을 기다렸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1차 경매는 이뤄지지 않았다. 낙찰자가 없었던 게 아니고, 경매 기일 자체가 미뤄졌다. 세입자 일부가 경매 연기 신청서를 냈기 때문이다. 10여 명의 세입자가 거주하는 그 건물에는 집주인이 설정한 공동 담보가 설정돼 있다. 호실별로 경매를 받을 수 없는 이유다. 호실별 경매가 가능하다 해도 사실상 낙찰될 가능성은 없지만, 어쨌든 모든 호실은 공동운명체였고, 합의를 이룰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 세입자가 경매가 진행될 경우 결국 전세금을 떼일 것을 우려했고, 경매가 지금 진행되는 것에 반대했다. 집주인의 형사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이들이 경매 연기 신청서를 낼 것을 알고 다른 세입자 몇몇이 나와 비슷한 논리로 그들을 설득했지만, 결국 3명이 경매 연기를 신청했고, 경매는 미뤄졌다. 그리고 이후 몇 개월간 경매 날짜는 잡히지 않았다.
경매를 반대하는 세입자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내가 더 무기력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나중에 그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진심으로 고마워할지도 모른다.(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 분노 좌절을 계속 안고 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버거웠다. 처음 전세사기를 인지했을 때 받았던 충격과 좌절감이 그대로 또 나를 때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터널을 언제까지 걷게 될까, 그 끝이 빛이든 더 캄캄한 어둠이든 끝이 나긴 하는 것일까. 그 끝에서 나는 조금 더 터널을 걷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 홀가분하게 여길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 것이든 조금 확실해지길 바란다. 비록 정해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처음 전세사기를 당한 게 2023년 6월이고, 지금은 2025년 1월이다. 어느덧 1년 6개월이 훌쩍 지났다. 처음과 지금 달라진 상황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나는 전세사기 피해자가 되었고, 법정을 드나들고, 우편물만 도착해도 깜짝 놀라는 사람이 되었다. 살던 집의 엘리베이터는 멈춰섰고, 나는 인근 임시 거주지에서 매일 그 집을 보며 출퇴근한다. 집주인의 형사재판은 다음 달 마지막 공판을 앞두고 있다. 또 한 번의 탄원서를 작성하면서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린 사람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벌을 받길.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증금을 전액 변제하길. 올해는 부디 이 터널의 끝을 볼 수 있길. 그리고 부디 그 끝이 절망적이지 않길. 비록 그 끝이 더 처절한 어둠일지라도 지금껏 버틴 힘으로 또 묵묵히 견뎌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