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말했다 "제일 힘든 건 나"

첫 번째 법정기일에서

by 윤서A

살면서 법원과 법정을 찾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부산회생법원 OOO호. 첫 번째 법정기일이 열리는 날, 나는 인생 최초의 법정행을 경험했다. 사전 정보가 없었고 알아볼 여력도 없었기에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법정 재판 장면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다수의 정보에 의하면, 법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진다. 발언을 미리 준비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한글파일을 띄웠다 닫기를 반복했다. 지금 파산이 진행되면 나의 전세금을 포함한 10억대 저당금이 사라지게 된다. 개인의 파산을 이유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건 어떤 이유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집주인은 파산 기간에도 외제차를 리스하고 골프를 다니는 등 우리의 보증금을 마치 자신의 재산처럼 까먹었다. 어떤 식으로든 갚을 의무가 사라지는 파산은 이뤄져선 안 됐다.


처음 도착한 법정은 내가 생각한, 스크린에서 보던 모습과 무척 달랐다. 분명 시간에 맞춰 왔는데, 재판 당사자 이름이 수십 명이 적혀 있어서 첫 번째로 당황했다. 오후 2시30분에 열리는 법정기일의 당사자가 30명쯤 됐다. '잘못 찾았나?' 게다가 호명(집주인의 이름)하는 절차도 없고, 재판장은 여러 사람이 오가느라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언제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직원에게 문의했고, 직원은 이름을 확인하고는 들어가서 대기하면 된다고 했다. 심호흡 뒤 들어선 법정은 마치 경매시장 같았다. (물론 경매시장도 가본 적 없지만) 판사와 속기사 등이 앉아 있고, 한쪽에 변호인단의 자리가 마련됐다. 그리고 판사가 마이크를 통해 당사자 이름을 호명하면, 법정 중앙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해당하는 사람이 일어나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판사는 변호인과 대화했다. 대화는 짧았다. "지난번 상황과 달라진 점 있나요" "OOO 씨 이해관계자 오셨으면 발언하시겠습니까" 등이었다. 한 명당 재판이 열리는 시간은 길어야 1분 남짓. 이제야 수십 명의 이름이 같은 시간대에 적힌 이유를 알게 됐다. 게다가 이곳은 회생법원이다. 파산 회생을 신청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뜻도 된다.


집주인 이름이 언제 불릴지 몰라 귀를 쫑긋 세워뒀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 말고 다른 세입자 서너 명의 얼굴이 보였다.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앞을 응시했다. 몇십 초 만에 누군가의 파산과 회생이 결정되거나 유예된다. 한 번에 결정 나기는 힘들어서, 대부분 다음 기일 일정을 통보받는 식이었다. 중앙에 앉은 사람은 늘 말이 없었고, 변호인단, 그러니까 파산관재인은 한 사람당 20~30명의 재판을 관리했다. 바꿔 말하면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30분 동안 약 30명의 파산 신청자들을 한 곳의 변호사사무실(파산관재인)에서 관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다양한 질문과 민원에 파산관재인이 왜 감정 없는 말투로 같은 말만 반복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됐다. 채권자들로 보이는 이해관계자의 격한 발언도 이어졌지만, 지금 이 법정에서 감정적인 사람은 채권자들뿐인 듯했다.


드디어 집주인의 이름이 들렸다. 나는 두리번거렸다. 죄를 지은 듯 쭈뼛거리는 집주인이 구석에서 일어나 중앙 의자에 앉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위한 재판인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근거린다기보다는,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 들었다. 지금 저 사람 때문에 나는 겪지 않아도 될 법정 재판을 마주하고 있다. 재판뿐이랴, 저 사람의 파산 신청 이후부터 벌어진 모든 일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분노가 마구 치솟았다. 판사는 피해자들의 이의 제기 신청 서류를 보고는 "길어지겠네요. 파산관재인은 피해자들이 보증금 잃지 않도록 우선 매각 등 방안 알아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방청석에서 이해 당사자들을 찾았다. 나를 비롯한 세 명이 손을 들었다. 발언할 게 있느냐고 묻자, 다른 세입자는 쭈뼛거렸다. 나는 준비한 대본도 글귀도 없었지만 손을 들었다. "발언하세요." 판사가 말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우리의 보증금을 저당 잡아 본인의 사치스러운 삶을 즐긴 점, 그리고 건강상 이유로 다른 수익이 없어 파산 신청을 했으면서도 담배를 피우고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더는 수익활동을 하지 못해 빚 갚을 여력이 없는 것처럼 우기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중간에 한 번 감정이 넘쳐 목소리가 떨렸지만, 어쨌든 꼭 전해야 할 말이었다. 속기사는 내 말을 기록했고, 판사는 짧게 다음 법정 기일 일정을 알렸다. 첫 재판은 그렇게 1분도 안돼 끝났다.


재판이 끝나고 집주인이 법정을 나가자 나도 뒤따랐다. 우리는 사건 이후 '처음' 집주인과 대면했다. 집주인은 말이 없었다. 사과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으니 나도 당황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나는 물었다. 집주인은 변호인이 시킨 말만 반복하듯 "이래 됐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이 대면 상황을 짧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지금 상황만 모면하려는 집주인과 답답한 세입자 간 답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나는 슬슬 이 사람의 진정성에 의심이 들었고, 나아가 기만당하고 있다는 분노가 느껴졌다. "건강이 안 좋아 일도 못한다면서, 담배도 피우고 골프도 치고 다하셨던데요?" 쏘아붙이듯 물었다. 집주인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 제일 답답한 건 나잖아요. 나도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어쩝니까"


적어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우리가 연차를 내고 법정에 왔으며, 전세금 찾으려고 몇 만 원씩 상담비를 내면서 변호사 사무실을 들락거리고, 살던 집에서 안전을 위협받고 사는지 모른단 말인가? 보증금은 내 청춘이고 나는 내 청춘을 통째로 잃어버릴 기회에 처했다. 적어도 나 같은 사정을 가진 사람이 이 건물에만 10명이 넘는다. 그건 모두 한 사람의 가해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일 답답한 게 본인이라고?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골프를 치지만 파산 신청을 해서 우리 보증금을 갚지 않겠다고?


법원을 나오니 빗줄기가 굵어졌다. 외제차가 다가와 집주인을 태워 갔다. 돌아서는 차량에 큰 돌멩이라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총이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쐈을지 모르지. 끝 모를 곳부터 거대한 분노가 올라와 나를 삼키는 게 느껴졌고, 동시에 분노만큼 거대한 우울이 나를 덮치는 게 느껴졌다. 뜨겁게 분노하지만 축축하게 우울해서 지표면의 나는 그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을 뿐이다. 너무 답답한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이런 거구나. 저렇게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저 사람에게서 나는 보증금을 받아야만 한다. 돈이 없다면 추후 노동을 통해서 매달 얼마씩이라도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는 강렬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가만히 서 있을 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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