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데스 스트랜딩(2019)
해당 글은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 데스 스트랜딩(2019)에 대한 최소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9년, 게임계에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 던져졌다. 코지마 히데오가 코나미를 떠나 자신의 독립 스튜디오 코지마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처음으로 선보인 작품, 데스 스트랜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게임을 마주한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단순한 걷기 시뮬레이터, 플레이 타임이 긴 영화라는 혹평이 쏟아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게임이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경지의 예술이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이러한 논쟁의 핵심에는 게임의 근본적인 플레이 방식이 있었다. 플레이어는 주인공 샘 포터 브리지스가 되어, 대재앙으로 파괴되고 단절된 북미 대륙에서 홀로 짐을 짊어지고 황량한 땅을 횡단하며 물건을 배송해야 한다. 게임의 상당 부분은 그저 걷고, 또 걷는 행위의 반복이다. 화려한 액션이나 즉각적인 보상을 기대했던 많은 AAA급 게임 팬들에게 이러한 경험은 당혹스러웠다. 더하여 게임의 독특한 세계관과 전문 용어의 남발은 플레이어를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데스 스트랜딩을 단순한 택배 게임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요소들이 너무나도 복합적이다. 게임은 험준한 지형을 극복하는 퍼즐적 요소, 다른 플레이어와 비동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길과 구조물을 만들어나가는 독특한 멀티플레이 시스템을 통해 기존 게임 문법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결국 데스 스트랜딩을 둘러싼 비판과 찬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재미가 무엇일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코지마 히데오가 왜 그토록 영화적인 연출을 고집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번 글에서는 왜 데스 스트랜딩이 영화가 되려 했을지 알아보자.
1. 코지마 히데오
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던 게임 개발자.
데스 스트랜딩의 영화적 스타일은 갑작스러운 변덕이 아니다. 코지마 히데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작가주의다. 마치 영화감독처럼,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이자 작품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코지마의 영화에 대한 애정은 초기작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1988년 작 스내처와 1994년 작 폴리스너츠는 각각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리썰 웨폰 시리즈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비주얼 노벨로, 영화적 서사와 연출을 게임에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1998년, 메탈 기어 솔리드에서 폭발적으로 만개한다. 이 게임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으로 실시간 3D 그래픽을 활용하여 영화의 카메라 워크, 편집, 극적인 긴장감을 그대로 구현해냈다.
이후 메탈 기어 시리즈는 회를 거듭할수록 길고 정교한 컷신으로 유명해졌다. 단순히 오락거리를 만드는 것을 넘어, 핵 확산, 정보전, 냉전 시대의 편집증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영화적 서사를 통해 탐구했다. 처음 잠입 액션이라는 생소한 장르를 제안했을 때 주변의 회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전을 밀어붙여 세계적인 성공을 이뤄낸 고집은 작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가주의가 정점에 달한 계기는 바로 코나미와의 결별과 독립 스튜디오 코지마 프로덕션의 설립이다. 기업의 상업적 논리와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비전만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은행에서 대출조차 거부당하는 무일푼에 가까운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데스 스트랜딩은 바로 이 완전한 창작의 자유 속에서 탄생한, 그 어떤 타협도 거치지 않은 100% 순도의 코지마 히데오 작품인 셈이다.
결국 데스 스트랜딩의 영화적 연출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단순한 스타일의 모방을 넘어,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성숙한 주제 의식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오랜 열망이, 마침내 완전한 자유를 만났을 때 어떤 결과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2. 영화인들의 출연
스크린에서 작품을 만들던 사람들은 모니터로 그 자리를 옮겼다.
데스 스트랜딩이 영화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단연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배우들의 존재감이다. 노먼 리더스, 매즈 미켈슨, 레아 세두와 같은 유명 배우들은 물론, 기예르모 델 토로, 조지 밀러 등 세계적인 영화감독들까지 게임에 페이스 캡처로 얼굴을 비춘다. 영화의 핵심인 연기를 통해 감정적 리얼리즘을 극대화하려는 코지마 감독의 명확한 예술적 전략이다.
배우들의 열연은 게임의 몰입감을 한 차원 끌어올린다. 특히 매즈 미켈슨이 연기한 캐릭터인 클리프는 게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인상 깊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긴 컷신을 끝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감정선에 빠져들고, 이 덕에 텍스트나 단순한 음성 더빙만으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캐스팅에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 더 깊은 맥락이 숨어 있다. 주연 배우 노먼 리더스와 페이스 모델로 참여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본래 코지마가 코나미 재직 시절 개발하다 무산된 전설적인 공포 게임 사일런트 힐의 플레이어블 티저, P.T.의 핵심 멤버였다. 코지마는 코나미와의 불화로 프로젝트가 공중분해되자, 독립 후 가장 먼저 이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데스 스트랜딩의 캐스팅은 기업의 논리에 의해 해체되었던 자신의 창작 팀을 재결성하여 예술적 비전의 연속성을 증명하려는 감독의 저항적 선언이자, 게임의 서사에 영화적 깊이와 감정적 설득력을 불어넣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배우들은 코지마의 새로운 독립과 예술적 비전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가시적인 상징이다.
3. 걷고, 걷고, 또 걷기
데스 스트랜딩의 핵심 게임플레이는 걷기다.
데스 스트랜딩에서 플레이어는 무거운 짐의 무게 중심을 잡고, 험준한 지형과 변화무쌍한 날씨를 뚫고 나아가야 한다. 이 과정은 느리고, 고독하며, 때로는 극심한 불편함을 유발한다. 하지만 바로 이 의도적으로 설계된 불편함과 고독함이야말로, 게임의 가장 영화적인 순간을 위한 최적의 무대를 마련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속에서 보낸다. 발소리, 바람 소리, 샘의 거친 숨소리만이 귓가를 채울 뿐이다. 이렇게 감각이 극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게임은 결정적인 순간에 영화적 개입을 시도한다. 바로 아이슬란드 밴드, 로우 로어의 음악이다. 이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은 배경음악처럼 계속 흐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오랜 고행 끝에 언덕을 넘어 탁 트인 절경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특정 순간에만 극적으로 삽입된다.
이 경험은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로드 무비를 보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힘겨운 여정 끝에 마주한 아름다운 풍경과 그 순간을 감싸는 음악의 완벽한 조화는, '걷기'라는 단순한 이동 행위를 숭고한 미적 체험으로 승화시킨다. 코지마 감독이 게임 속 지형의 많은 부분이 아이슬란드의 실제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 연결을 더욱 운명적으로 만든다.
코지마는 감정적 문장부호라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플레이어의 길고 힘겨운 걷기는 하나의 긴 문장과 같다. 이 문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로우 로어의 음악이라는 마침표 혹은 느낌표를 찍어줌으로써 그간의 모든 고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성찰과 감동의 순간을 선사하는 것이다. 게임플레이는 감정적 긴장감을 축적하는 역할을 하고, 영화적인 음악 연출은 그 긴장을 해소하며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데스 스트랜딩의 걷기는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가장 영화적인 순간을 위해 플레이어의 감정을 조율하는 고도로 계산된 연출 장치라 표현해야 할 것이다.
4. 불편함의 미학
너무 재밌으면 안 된다.
데스 스트랜딩의 영화적 연출 이면에 숨겨진 코지마 히데오의 작가적 철학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후속작 데스 스트랜딩 2의 개발에 참여한 작곡가 우드키드에 따르면, 어느 날 코지마 감독은 테스트 반응이 너무 좋다는 이유로 게임에 문제가 있다고 선언했다. 코지마는 사람들이 게임을 너무 좋아한다면 뭔가 잘못됐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실제로 게임의 여러 요소를 변경했다.
모두가 좋아한다면 그건 주류가 된다. 즉, 평범하다는 뜻이다. 코지마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던 것들을 결국에 좋아하게 되길 원했다. 그래야 진짜로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는 거니까. 코지마의 목표는 즉각적이고 손쉬운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도전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적 여정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철학은 데스 스트랜딩의 모든 디자인에 반영되어 있다. 앞서 언급된 불편함을 전략화한 게임플레이 , 초반에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은 모두 이러한 의도된 불편함의 연장선에 있다. 접근성과 즉각적인 재미를 최우선으로 하는 주류 게임 산업의 경향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코지마 히데오는 일종의 후천적 미각을 설계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마찰을 경험하게 하고 노력을 요구한다. 고생 끝에 얻는 보상이 거저 주어지는 보상보다 훨씬 더 값지고 의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상의 핵심적인 매개체가 바로 영화적 서사다. 초기의 낯설고 쓴맛을 견디고 나면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깊고 풍부한 맛, 그것이 바로 코지마가 추구하는 경험이다. 그러니 영화적 연출은 미학적 선택을 넘어, 즉각적인 재미보다 지연된 감동을 우선시하는 그의 디자인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기능적 핵심이다.
데스 스트랜딩은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라기보다, 코지마 히데오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선포하는 대담한 선언문이다. 코지마는 아래 영상에서 자신의 차기작에 대한 포부를 밝히며 영화와 게임의 벽을 넘고 싶다고 공언한 바 있다. PHYSINT라는 코드네임으로 알려진 새로운 첩보 액션 게임은 콜럼비아 픽쳐스와 협력하여 제작된다.
이러한 미래 비전을 생각했을 때, 왜 데스 스트랜딩은 영화적 연출을 고집했는가?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다음과 같다. 코지마 히데오라는 작가가 자신의 독립 스튜디오 코지마 프로덕션의 예술적 강령이자 사업 계획으로 내세운 선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끝이 아니라, 코지마가 창조하고자 하는 엔터테인먼트의 미래를 향한 장대한 여정의 시작을 보여준 오늘의 게임. 데스 스트랜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