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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볍씨와 나 Sep 22. 2024

'볍씨와 나'의 기록이 말하는 것

지금은 롱디커플 - '볍씨와 나의 아카이빙'(2015~)을 시작하며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2015년 5월 '한평생 퀴어 기동이 형의 결혼식'에서였다.

다음 해 다시 만나 연인이 되었고, 그해 8월 미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이 예정되어 있던 볍씨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롱디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해 뒤, 볍씨는 한국에 2년 간 머물렀으며, 다시 미국에서 그리고 지금은 또다른 대륙에서 새로운 일터를 찾아 이주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한 아홉 해 중 2년을 제외하고, 소위 '롱디커플'로 살고 있다.


주변에서는 우리에 대해 "너희 참 대단하다", "어쩌려고 그러냐", "그게 가능하냐?", "참 고생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들의 말과 표정 속에는 롱디커플이기에 서로를 돌보고, 일상을 나누기 어렵고, 그에 따라 쌓아 가는 관계가 두터워지는데 장애를 겪고 있을 거라는 걱정과 애잔함, 측은함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여러 걱정과 우려, 응원을 마주하며 끝없이, 함께하고 있다.


올초에 시작된 나와 볍씨의 롱디기록 정리는 사랑을 시작하면서 보냈던 편지에 적은 글귀 -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으로 서로를 보살피고, 인정하고, 존경하며, 신뢰하고 헌신하는 과정"*의 한 챕터를 완성했기에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 밸 훅스의 all about love 中


지난해, 우리 둘은 인생의 큰 숙제이자 챕터인 학위과정을 마쳤고, 서로를 많이 축하하고 치하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시간을 기점으로 우리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또 다른 장으로 이어가고자 하였다.




우리는 자주 간혹 언젠가 '롱디커플 성공전략' 같은 걸 써보자가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록 안에는 단지 원거리 연애를 하는 이들의 고된 여정만이 아니라, '퀴어커플'이라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성소수자로 사는 중에 차별이 나를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롱디' 이야기는 우리가 단지 성소수자 커플이기에 겪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볍씨를 만나 나눈 행복만큼이나 우리가 퀴어커플이라서 겪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시간들은 우리의 기록을 그냥 사랑이야기, 연애담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나와 볍씨가 각자 쓴 아홉 권의 다이어리,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우리의 기록을 포개 '볍씨와 나의 아카이브'를 만들 요량이었다. 아카이브 안에는 관련된 맥락과 다양한 이야기가 함께할 것이므로 우리의 기록을 골간으로 우선 기록을 정리해 보면 몸담고 있는 세상, 그에 대한 생각, 주변 벗들의 이야기도 함께 하게 되겠지.... 생각했다.


올해 초 기록 정리를 위해 볍씨를 처음 만났던 때부터, 총 열 권의 다이어리를 다시 읽으며 엑셀에 표를 만들고 항목을 하나둘씩 추가했다.

"날짜(YYMMDD), 주요한 이벤트와 사건, 사건의 내용, 주변의 관련 사건.... "

우선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일지(日誌)로 정리했다.




그러나 이 작업의 다음은 초여름을 지나며 중단되었다.


볍씨가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는 졸업식에서 우리는 볍씨의 부친으로부터 강제 커밍아웃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사건은 우리를 슬픔에 빠지게 했다. 이 슬픔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 사건 때문에 우리는 가장 기뻐야 할 그날, 가장 좌절했다.

예쁜 초록과 선명한 색의 열매로 화려하게 빛나는 고요한 숲 속에 갑작스럽게 핵폭탄이 떨어지고 암전 되는 재난영화 같은 상황말이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고 시간은 흘렀다. 나는 평소와 달리 출근을 했고, 볍씨 역시 이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해 나가야 했다. 우리는 때로는 슬픔을 유예했지만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사건 이후, 당사자인 부친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지 못한 채 볍씨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하다. 또, 이성애자 형제들은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전략, 그것을 부정할 전략'을 운운하거나 오히려 놀란 부친을 걱정하는 양비론적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미 커밍아웃을 한지 꽤 지난 나의 가족들 역시 나와 볍씨가 겪은 일을 두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거나 '이겨내길' 촉구한다.

그러나 이 소동 또는 사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의 질문'이다.

"그 순간, 얼마나 힘들었니?"라는 말이다. "그간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니?"라는 말이다.


대신 우리에게 돌아온 가족들의 말 "왜 추궁을 긍정했냐?"며 "(너가 성소수자임을 말했지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부정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상처주겠다는 선언이다.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이 고작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으로 돌아올 때, 우리의 용기는 상처라는 메아리로 돌아온다.


2024년 5월 이후, 볍씨는 일터가 예정된 다른 나라로 떠나야 했다. 한국에 있는 시간은 고작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로 우리 둘은 어느 때보다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치유는 커녕 수습되지 않고 더 들쑤셔진 상처는 자꾸만 만져진다.

우리는 그것과 단절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단절해야 했다.


용서는 우리의 몫이지만, 그들은 어떤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모르니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대로 이어갈 시간 속에서 우리의 고통은 없었던 일이 되길 바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이후 우리의 기록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나와 볍씨, 우리가 함께한 세상,  선택하지 않은 원原가족, 진짜 가족인 나와 볍씨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멀리 있지만, 하루도 함께하지 않은 날이 없으며 각자의 앞에서 '나로서 행복하다'.

앞으로도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 함께 걸을 것이다.


그 시간 속 볍씨와 나의 기록은 계속될 것이다.


나의 다이어리들(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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