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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륫힌료르 Apr 30. 2020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뭐가 맞을까?

노무사 회사원이 알려주는 '5월 1일'의 두 이름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다짐했다.
"남들처럼 주말만 바라보며 살진 않을 거야!"

그런데 그 다짐은 얼마 못 가 얼음 녹듯 사라져버렸다. 일은 생각보다 고됐고 남의 지갑에서 돈을 빼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얼마간의 시간 속에서 나도 '불금'을 기다리고 '월요병'을 앓는 천 직장인이 돼 있었다.


월요이ㄹ 기나긴 낮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가는 주말 아쉬운 일요이ㄹ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 '월요병', 륫힌료르

(내가 '진짜 직장인'이 됐다는 증거..)


나와 같은 일개미들에게 5월은 축복의 달이다. 달력을 넘기며 잠시 행복에 잠겨본다. '올해 황금연휴는 몇 일이지?'

척박한 직장생활 속 한 줄기 오아시스. 금쪽 같은 연휴의 시작에 '5월 1일'이 있다. 일하는 사람의 노고를 기리는 날이라나.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분명 달력에는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라고 쓰여 있는데, 왜 노동계는 이날을 '노동절'이라고 부를까 하는 의문 말이다.


왜 5월 1일의 이름은 두 개일까?



혹자는 '노동절'이나 '근로자의 날'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글자씩 풀어보면 두 단어의 뜻은 엄연히 다르다. 


'노동'은 '일할 로(勞)'와 '움직일 동(動)'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정신적 육체적으로 움직여 일함"을 의미한다.


반면 '근로'는 '부지런할 근(勤)'과 '일할 로(勞)'로 구성되어 "부지런히 일함"을 뜻한다.



일하는 것과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일할 때 부지런해야 하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 같지만, '근로'라는 단어는 철저히 사용자의 관점에서 비롯된 말이다. 일하는 사람을 '근로자'라고 칭하는 것은 은연중에 그에게 "당신은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노동'보다 '근로'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일터를 규율하는 법은 '노동기준법'이 아닌 '근로기준법'이며, 5월 1일의 국가적 명칭은 '노동절'이 아닌 '근로자의 날'이다. 전 세계 많은 국가가 이날을 기념하고 있지만 유독 대한민국만 '노동'이라는 표현에 인색하다.

이러한 현상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노동계에서는 우리 정부가 북한을 의식해 '노동'이라는 표현을 기피한다고 말한다.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공산주의에 대한 반감)'라는 것이다. 노동계는 1963년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도입 당시, 정부가 '노동'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계급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이날의 명칭을 '근로자의 날'로 정했다고 설명한다.






말에는 힘이 있는 법이다. 나 역시 '노동'보다 '근로'라는 단어에 익숙해져있었다. 심지어 노무사 수험공부를 할 때조차도. 그래서인지 '노동'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면 빨간 투쟁조끼를 입은 강성노조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노동조합이라고 무조건 빨간 조끼를 입는 건 아닌데 말이다).


노동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인격, 또 다른 누군가의 자본과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끝도 없이 얽혀있다. 노동이 정치적 싸움의 단골주제로 등장하는 이유다.


물론 정치를 빼고 일터를 논할 수는 없을 것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단어에 특정 프레임을 과하게 씌움으로써 그 의미가 퇴색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립을 지켜야 할 정부가 편향된 이념을 갖고 있는 것이 맞다면, 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국민 대다수가(심지어 노동자 스스로도) 알게 모르게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회화 과정을 거쳐서일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나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직장을 갖고 노동자가 되고서야 비로소 노동의 가치를 알아가고 있다. 노무법인 재직시절, 노동의 가치도 모르면서 자문회사에 이래라 저래라 했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는 것에 당당하다. 매년 5월 1일을 '노동절'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의식주ㅡ매일 먹는 음식, 살고 있는 집, 입고 있는 옷ㅡ는 모두 누군가가 피땀으로 일궈낸 '노동의 산물'이다. 일하는 자들의 유일한 명절인 5월 1일, 이날만큼은 이념다툼을 내려놓고 노동절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게 어떨까? 이 땅의 모든 일하는 자들의 노고는 거룩하며, '일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가치 있으니 말이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희생된 노동자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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