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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조 Nov 09.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결국 포옹일 뿐인

허무를 극복하는 단 하나의 진실에 대하여

키치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사유

  "키치함"은 좋게 말하면 대중적이라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저속하다는 뜻이다. 엽기적인 모양새로 말초적 쾌락을 자극하는 작품에 붙는 수식어로, B급 감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에브리씽 에브리타임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 역시 그 비주얼로 봤을 때 제대로 키치하다. 온갖 잡동사니를 토속적으로 모아 놓은 포스터부터 핫도그 손가락을 치켜든 양자경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많은 조각들이 우리의 배꼽을 잡게 한다. 


그러나 <에에올>의 얼굴은 키치하지만 그 사유는 키치하지 않다. 

  코믹한 시퀀스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에에올>의 글쓰기는 논리적이면서도 수사적이다. 매 장면에 경탄하며 설득당할 수밖에 없고,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상징과 이야기들을 곱씹고 천착할 수밖에 없다.



의미 없는 수많은 가능성들

  신을 '전지전능한 절대자'로 정의한다면 작중 조부 투바키는 신 그 자체다. 다만 그녀는 어린 양들을 굽어살피는 기독교적 인격신은 아니다. 에블린의 무리한 실험에 의해 정신이 산산조각나고 모든 곳에서 일순간에 존재할 수 있게 된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절대악으로 표상된다. 

하지만 투바키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그녀의 논리에 동조하게 된다. 

사소한 선택에 따라 무한히 가지를 치는 가능세계, 동그랗게 반복되는 일상 혹은 혼돈, 의미없는 수많은 우연의 파편... 원자적 개인들의 치열한 드라마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느낀 투바키는 결국 허무의 심연에 도달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허무와 회의주의는 우리의 직관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 실존적인 고민을 하다가도 결국 당위적인 삶을 살아내며 만성적 우울에 빠진 현대인에게 투바키의 변론은 큰 설득력을 가진다. 그녀는 무용한 일상의 조각들을 베이글에 올린 후 소멸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어느새 그 자기파괴적 결말을 응원한다.



결국 포옹일 뿐인

  혹자는 결말이 싱겁다고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투바키의 화려한 논리를 이기는 것은 '사랑'이라는 다소 뻔한 히어로다. 수많은 가능세계와 연결돼 전지전능해진 에블린이 투바키에게 대항하는 무기는 고작 포옹이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 의미없는 가능성의 파편을 하나의 내러티브가 되게끔 하는 것, 순환적으로 반복되는 세계 혹은 혼돈을 일축하는 것, 전지전능한 회의주의를 가장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결국 포옹일 뿐이다.

그러나 포옹은 상투적이지만 유일한 결론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나는 덧없는 통계의 산물에 불과하기에 스스로를 파괴하겠다는 논변. 이 논변을 반박의 여지 없이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이 작품을 모성애 혹은 가족애의 승리로만 이야기한다면 불충분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류의 파국을 극복하려면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져야 한다. 영화 초반, 에블린은 다른 세계의 자신과 연결되기 위해 학살자 디어드리 씨에게 진심으로 '사랑해요'라고 말해야 했다. 어쩌면 팔을 부러뜨리는 것보다도 끔찍한 조건이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에블린은 핫도그 손을 가진 디어드리, 국세청 조사관 디어드리, 자신을 죽이려 드는 디어드리 모두에게 진심어린 애정을 품는다. 또한 에블린을 해치기 위해 온 투바키의 심복들에게도 행복을 선사한다. 


사랑이 아닌 다른 시나리오로 세계 멸망을 방지할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을까?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는 결론은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어쩌면 뻔하지만 우리를 충분히 잘 설득해 내는 것 같다.




 나는 가만히 마비된 채로 눈을 반짝이며 139분을 전유하다가 막이 내린 후에야 기나긴 호흡을 내뱉을 수 있었다. 영화관에 있는 아무나와 포옹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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