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유에 관하여
인생을 누리는 사람이 있고 견디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다수는 후자다. 많은 경우 인생의 흐름은 실존이 아닌 당위다.
그러나 생명의 무의미한 연장이 일종의 목적성을 띄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납작하게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하던가. 터닝포인트는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연속적이기보다는 단절적이고, 능동적이기보다는 피동적이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이러한 순간들은 거시적인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생의 타임라인에 흩어져 때때로 기분 좋은 전기충격을 가한다.
나는 이 격정적인 체험을 ‘뒤흔들리는 순간’으로 부른다. 나를 뒤흔드는 순간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다수는 문학이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프린들 주세요>, (청소년용)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흔들렸고, 좀 더 머리가 큰 후 읽었던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과 조지 오웰의 <1984>가 나를 신음하게 했다.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책의 메시지를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러 번 읽었는데, 읽는 도중엔 늘 (펴본 적도 없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김홍중의 글을 읽는다. 그의 한 글자 한 글자는 아주 공들여 예민하게 읽어야 한다. 순간순간 나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를 제대로 읽는다면 한 시간에 4페이지도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좋은 글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때로는 아주 현실적인 것들에 뒤흔들리기도 한다. 가령 신문사에서 밤을 새다가 잠깐 밖에 나왔을 때 맞는 청명한 새벽 공기가 그렇다. 밤을 새면 몸이 아주 저릿해지는데, 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오늘의 아침을 맞이할 때. 아, 나는 글을 계속 쓸 수밖에 없겠구나.
조만간 나를 뒤흔든 것들을 다시 만나서 정리해 볼 생각이다. 때로는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생명의 연장을 지속하는 것은 언젠가 본인을 감전시킬 만한 것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은 나를 강력하게 변질시키는 것들을 만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저항할 수 없이 육박해 오는 격정의 체험.
죽고 싶을 정도로 뒤흔들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