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각자 조심하라는 의도였겠지만 여기저기 봇물 터지듯 열리는 모임에서 부르는데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든 일이었다.
자율방역으로 활짝 열려있는 수영장엘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다니고 친구들 만나면서 신나게 돌아다닌 대가는?
엊그제 코로나 확진자 10만 명 이상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는데 거기에 나도 일조를 했다. ㅠㅠ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뉴스를 보며 아이쿠 조심해야겠네, 였겠지만 막상 내가 그 십만 명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코로나 이후 첫 만남이었던 어느 모임에서 그동안에 코로나 확진되었던 사람이 꼭 절반이었는데 반반의 사람들이 서로 우리가 정상이라느니 옥신각신하며 웃었던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 초기에 확진자가 나왔을 때, 그 사람이 어느 식당에서 누구와 무엇을 먹었고 어디 어디를 갔었다는 그 동선까지 만천하에 드러났었던 것을 생각하면 소수가 아닌 다수에 속하는 상황이 되니 이렇게나 관점이 달라질 수 있을까 싶다.
내가 재작년 이맘때 코로나에 걸렸더라면 당장 우리 아파트 1층에는 코로나 환자인 나를 데려가 격리하기 위한 구급차가 출동해 있을 것이고 내가 다니던 수영장은 폐쇄될 뿐 아니라 같은 시간에 사용했던 사람들까지 PCR 검사를 받기 위해 보건소 간이 검사소 앞의 긴 줄에 가서 서있어야 될 일이다.
목이 좀 칼칼한 느낌이 들어 혹시나 싶어 집에 있는 코로나 자가검사 키트를 사용했더니 한 줄은 선명하게, 또 다른 한 줄이 희미하게 나타나길래 확답을 듣기 위해 딸들이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 그 애들은 이미 지난봄에 한차례씩 코로나 유행을 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응들이 드디어 엄마도 걸렸네,였다.
가족뿐 아니라 여기저기 알렸더니 대부분의 반응이 '드디어 걸렸다'는 멘트다. 코로나가 이젠 거쳐가야 할 통과의례 비슷하게 되었나 보다.
언제 어디서 감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의사도 요즘 그런 사람 많아요 하며 시큰둥하게 말할 뿐이다.
병원에서 양성 확진을 받고 집에 오니 제일 먼저 보건소에서 문자가 왔다. 귀하는 몇 월 며칠 자정까지 자가격리 대상이라는 통지였는데 60세 이상 고령의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었다.
나는 안방에 격리되어 코로나 환자답게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리기 시작했다. 재활용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었는데도 물론 나갈 수 없으니 아들을 시켜먹었고 남편에게는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려달라고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남편과 아들은 깔끔하게 설거지도 잘했다. 눈앞에 닥치면 다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거다.
열은 좀 나고 목이 아프기는 했지만 거실과 서재방을 나 혼자 쓰면서 모처럼의 휴가를 즐겼다. 남편은 거실과 주방 쪽을 사용하면서 자질구레한 집안 살림을 맡게 되었는데 나는 밥 걱정을 안 해도 되니 그도 은근 괜찮았다.
언젠가 형제들과 나눴던 얘기가 생각났다. 우리가 모두 늙어 힘이 없어지면 양로원 대신에 이 집에 한데 모여 요양보호사를 고용해서 살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복잡한 서울에 사는 형제들이 공기도 좋고 대중교통도 비교적 잘되어 있으니 요양보호사가 출퇴근하기도 좋을 거라며 우리 집을 점찍었을 때 나도 동의를 했었다. 우리 부부가 가장 나이가 많고 다들 연금 빵빵하게 받을 사람들이니 손해 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르는 늙은이들 틈에서 눈치 싸움하느니 익숙한 형제들과 여생을 보내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넓은 평수로만 이루어져 있는 우리 아파트는 엘리베이터에서 사람 마주치기도 힘들 만큼 조용한 편이다. 인접해있는 뒷산 산책로를 비롯해 가까이에 쾌적한 공원까지도 지팡이 짚고 종종 산책할 수 있겠다 싶었는지 노후에는 우리 집이 딱이라며 신나 했던 동생에게 지금 하고 있는 격리생활을 얘기하며 우리의 미래를 미리 체험하고 있다고 그때의 결의를 상기시켰다. 그랬더니 내가 진짜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냐면서 깔깔 웃었다.
"난 젊은 사람들 많이 돌아다니는 서울에서 그냥 살 거야."
하긴 코로나 환자 마누라를 피해 도서관으로 줄행랑치는 남편만 봐도 늙고 힘 못쓰는 사람은 누구에게든 짐이 될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짐이 되겠지만 그 기간을 되도록 짧게 끝낼 수 있도록 하나하나 준비를 해나가는 수밖에 없겠다.
이번 격리생활을 통해 미래에 진짜 아프게 될 내가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대충 짐작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당장 생활이 불편해지니까 뭐든 대충대충 하려고 했다. 각자 알아서 식사를 하라고 했더니 치킨이나 샌드위치처럼 뒤처리가 간편한 음식을 사 오고,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주꾸미, 떡볶이 순대 등을 사 와서 연명하면서도 죽집에서 여러 가지 죽을 사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데워 드시라고 해서 아빠보다는 낫다고 했다. 내 짐작으로는 아무래도 여자 친구 아플 때 경험해봐서 그런 것 같으니 그 부분에서는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다.
각자의 배우자가 있는 딸들은 단톡방에 열심히 어떡해 어떡해를 두들겨 대다가 새벽 배송으로 간편식과 과일 케이크 등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배달시켜주었다.
남편은 내가 망고를 좋아했다는 게 생각났는지 망고를 통째도 사다 두면서도 먹기 편하게 까줄 생각은 못한다. 딸들이 배달시켜준 수박도 며칠 동안 자를 엄두조차 못 내다가 어제는 아들과 둘이 씨름을 하다시피 해서 잘라 둘 정도로 주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집안은 엉망이다.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 꼭꼭 쓰고 거실로 나오는데도 남편과 아들은 내 옆을 슬슬 피하면서 한편으로는 '저 정도면 집안일 못할 정도는 아닌데' 하는 표정들이다.
그래도 어림없다. 모처럼 내게 주어진 합법적인 휴가를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쓸 것이다. 어차피 내가 밥상 차리지 않아도 잘만 돌아가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나 누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누리려고 했는데 오늘은 집안 청소를 하고 말았다. 아들은 출근했고 남편은 도서관으로 가서 일찌감치 자리를 피해 줬기에 나도 모르게 돌아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열도 내려갔고 목 아픈 것도 다 나았다. 남편과 아들의 눈이 정확했나 보다.
아픈 여왕의 자리에서 5일 만에 씩씩한 무수리로 돌아온 나는 아직 이틀이나 남은 환자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 못한 게 약간 억울했지만 그래도 건강한 것이 최고다. 잘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건강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