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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bysparks Mar 14. 2019

[D+9] 계획에 없던 일출을 봤다

앞으로 일출 마니아가 될 것 같다

일출을 봤다. 일출 여행 같은 건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 갈 생각도 없는데 일출을 봤다. 일출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말 아름답다. 칠흙같던 하늘이 태양색과 섞여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색으로 서서히 바뀌면서 나도 모르는 새에 주변이 밝아져있다. 공기는 더없이 맑고, 너무나 고요한 가운데 물소리, 새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온다.


좋은데, 다 좋은데 나는 일출을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일출을 봤다. 단호가 일찍 깬 덕분이다. 문제는 앞으로 계속 보지 않아도 괜찮은데, 어쩐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매일 보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호 때문이다. (단호 덕분이다.)


남편과 한국에서 온 오빠 두 사람이 있어서 단호를 맡기고 발리 온 후 처음으로 마음 편히 이유식을 만들어봤다. 부엌이 야외에 있는데 온갖 벌레와 납작한 도마뱀들이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핸드폰에서 벅스 어플을 켜고 오랜만에 음악이라는 것을 들었다. 잔잔한 음악과 곤충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BGM 삼아 이유식을 만들었다. 진밥 먼저 하고, 닭고기를 삶고, 당근, 청경채를 채 썰어서 모두 밥통에 부은 다음 이유식 모드를 눌렀다. 이상하다. 방법은 분명히 한국에서와 비슷한데 맛이 없었다. 그래도 그 맛없는 걸 다 먹어주는 단호가 정말 멋있다.


오늘의 주요 일정은 세탁소 찾기다. 빨래가 산더미였다. 지난 일주일은 손빨래로 어떻게 버텨봤지만 여름이라 나와 남편도 옷을 몇 번씩 갈아입고, 아기 빨래는 말할 것도 없이 많으니 매일 밤 밀려드는 빨래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발리에는 세탁소가 많다. 이곳의 세탁소는 한국의 세탁소와는 다르다. 세탁기에 돌리면 상하는 옷을 ‘드라이 크리닝'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탁기로 빨래를 해준다. 이곳에선 큰 세탁기와 큰 건조기가 있으면 세탁소를 차릴 수 있다. 오래 전 필리핀을 여행했을 때도 그곳에 살던 사촌언니가 필리핀에는 세탁기가 귀하다는 말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 여행을 하는 동안 하천이나 강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들을 매일 같이 마주쳤다. 발리의 세탁기 사정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쩐지 1가구

1세탁기는 아닌 것 같았다. 세탁소가 많은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세탁소로 정했다. 일하는 언니들은 낯을 가리는 듯 하면서도 상냥했다. 가격은 1kg에 12K(약 1500원)로, 맡긴 다음날 오후 2시 이후에 아무때나 찾으러 오면 된다고 했다. 빨래 무게로 가격을 측정하다니 마치 정육점에 온 것 같았다. 모아둔 우리 빨래들을 저울에 올리니 2.5kg이 나왔다. 마음의 짐에서 2.5kg가 빠져나가니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계산은 빨래를 찾을 때 하면 된다고 했다.



맛집 같은 건 안 찾는다는 게 원칙인 우리 부부지만 한국에서 손님도 왔으니 오늘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로 했다. 'Naugty's Warung'이라는 맛있는 립을 파는 곳이라고 했다. 구글로 찾아보니 숙소에서부터 도보로 40분 거리에 있었다. 뭘 타고 가야 하나 난감했지만, 일단 걸어 나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나와 어제와 반대방향으로 걷는 사이 생각지도 못한 풍경에 모두 놀랐다. 푸른 논이 길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고, 고랑 사이로 졸졸졸 시원하게 물이 흘렀다. 차도면서 인도이기도 한 우리가 걷는 길의 가로수는 크고 멋진 야자수거나 잎이 넓고 시원스런 열대 나무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다리 아래에는 놀랍도록 깊은 무시무시한 골짜기가 숨어있고, 중간 중간 나타나는 큰 저택의 대문은 화려하고 이국적이었다.



반대편 골목에 접어들자 이 동네 아이들 모두가 다니는 것 같은 큰 학교가 나타났다.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운동장 안을 훔쳐보니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동네가 너무 재미나서 걸으면 40분이나 걸린다는 구글 지도의 경고도 까맣게 잊고 그냥 계속 걸었다. 나중엔 다리도, 허리도, 두번째 발가락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지만 뭘 타기도 애매한 거리가 되었고, 그렇게 한 시간을 내내 걸어 립 맛집에 도착했다.


이른 저녁 시간이라 식당 안에는 한 테이블만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한국 커플이었다. 한국말을 하며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 여자분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해주셨다.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했던가. 실제로 소리를 냈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해외여행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어쩐지 뭔가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중국사람만큼 피하고 싶어지는. 명소나 맛집에서 한국말이 들려오면 마치 몇십년을 도망쳐다닌 빚쟁이를 만난 것처럼 가능한 서로를 피해 지나치는데, 서로를 의식하는 그 모습이 또 너무 티나가서 누가봐도 한국사람 같다. 익숙한 풍경(또는 사람)을 떠나 온 여행이니 이국적인 풍경(또는 사람)만 보고 싶은 한국인의 마음도 이해는 되나, 가끔은 그게 좀 이상한 상황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오늘 우리를 보자마자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인사를 건네는 성숙한 한국 어른을 보며 그간 한국인을 티나게 피했던 내 모습을 반성했다.


립은 신촌에서 자주 먹던 식당과 비슷한 맛이었다. 맛이 없지 않지만, 또 뭐 그렇다고 40분을 꼭 걸어서 왔어야 했나 싶은 생각도 잠깐 들 정도. 하지만 아이를 안고 하루종일 10km를 걸으면 립이 아니라 랩을 벗겨 줬어도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내내 매달려온 단호도 싸온 과자와 바나나를 허겁지겁 먹었다. 우리는 립과 소시지를 빈땅과 함께 눈깜짝할 새에 먹어치우고 나와서 마침 길에 서 있던 박소(어묵탕) 아저씨에게 박소 두 그릇을 시켜 그것도 싹싹 비웠다.



단호를 재운 뒤, 베란다에 셋이 앉아 맥주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도마뱀과 모기와 이름 모를 벌레들과 함께 하는 베란다 펍이 아주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내일도 아름다운 일출을 보게 될 것만 같아 설레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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