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도비 의대생의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읽는 이야기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현진아, 엄마가 전주에 언니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 거 같아."
"뭐? 그럼 나는?"
"아빠가 올라오실 거야."
"아빠랑 둘이 살라고? 차라리 자취를 시켜줘"
"아빠가 서울에서 일하게 됐대. 가족이 둘 다 서울에 사는데 굳이 따로 살아야 하니? 전세금은 땅 파면 나와?"
나는 서울 어디쯤에 있는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의과대학의 생활은 바쁘기로 매우 유명하다. 그리고 알려진 것보다 훨씬 바쁘다. 본과 1, 2학년 때에는 매일 압사당할 것 같은 양의 강의 슬라이드를 소화해야 한다. 그 와중에 시험과 과제는 또 얼마나 많은지 밤새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실습 중에는 조금 사정이 낫긴 하지만 7시까지 병원으로 출근해야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5시에 퇴근하고 나면 그 과의 공부를 하고, 케이스 발표를 준비하고, 시간이 조금 남으면 국가고시 시험을 준비한다.
이렇게 꽉 채워진 생활 계획표에는 더이상 나눌 파이가 없다. 많이 양보해서 혼자서 사는 거라면 모를까. 2인 가구의 집안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는 집안에서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자란 철없는 막내딸 포지션이다. 쌀도 안칠 줄 모른다. 화장실 청소는 어떻게 하는 거지. 아 맞다. 나 세탁기도 돌릴 줄 몰라... 절대 안 돼. 난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갑자기 위기감이 턱 끝까지 몰려온다. 엄마를 절대로 보낼 수 없다. 투쟁해봤지만 어른이 아닌, '우리 집의 아기' 막내딸은 발언권이 없다. 몇번의 눈물과 언쟁이 지나고 걱정만 쌓이는 채로 엄마가 떠날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