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봄 날에는 - 마음은 가을이었다.
그해 봄이 그랬다. 하루 종일 맑았고 비도 바람도 없었다.
양지바른 곳에서 책을 읽거나 맥주 한잔 들고 산책하기 딱 좋은 날 들이었다.
그 후로 그런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황사와 미세 먼지. 주말마다 비가 오고 건조한 강풍에 산불까지.
반복되는 황량한 봄을 볼 때마다 유난했던 그 해 봄을 기억한다.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벚꽃이 그렇게도 예쁘디, 바보들아!
결국 꽃잎은 떨어지지...... 너네도 떨어져라...... 몽땅 망해라!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대할 일이 아니다. 애초에 기대를 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어떤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만나러 나가는 짓은 절대 하면 안 된다. 나도 그 애를 좋아할 수 있는가를 느끼기 전에 거만해졌다. 그냥 마구 심심했다. 그 애의 진심을 놀리고 싶었다. 재밌는 것만 상상하다니.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페로 들어섰다. 맥주나 한잔하고 슬슬 걸어서 집에 가는 플랜.
카페의 이름은 "너는 산 타, 나는 사람 타"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신입생 시절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등산 동아리 선배들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말이 등산 동아리지 주말에 남산 산책도 안 하는 사람들이었다. 산보다 술을 좋아해 어두컴컴한 카페에 드나들었다. 뭐 그랬다. 그날도 몇몇이 두런거리며 앉아있었다.
동아리 멤버들 사이 한쪽 구석에 나의 좋은 친구 해수가 있었다.
다소곳이 맥주잔을 앞에 놓고 누군가와 통화 중. 손짓으로 나를 읹히고 맥주를 따라주는 동안 침을 꼴깍이며 기다리다가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무용담을 펼쳤다. 해수는 잠자코 듣기만 했고 떠들던 내가 지쳐 맥주를 다시 따랐다.
“너는 안돼, 너 같은 자세로는 여자애들 못 사귄다. 상대가 맘에 안 들어도 최소한의 매너는 지켜야지.
못 생겼다 구박하고, 심심하다 탓하고, 내숭이라 보기 싫고, 도대체 맘에 드는 여자가 어디 있냐.”
“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대화가 통해야 할 것 아냐. 나 좋다고 찾아왔는데 안 본다 할 수는 없고 일단 대화를 시 도했는데 안 통하니까. 안 되니까 그런 트집을 만드는 거지. 안 그러고 조그만 여지라도 주면 피차 힘들어지는 거야, 잘 못 엮이면 도망도 못 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해수를 보며, 이 아이를 기준으로 보면 눈에 차는 여자 찾기 힘들겠단 생각도 했다. 167cm의 키에 날씬한 몸. 특히 다리가 예쁘다. 뚜렷한 이목구비. 안경 뒤 눈동자에 맺힌 총기. 해수와 유치원 동기라는 공식적인 관계만 아니라면 과분한 이이다.
어린 시절에 운명적으로 맺어져 아무 날이나 술 먹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특히 날씨는 좋은데 할 일은 없고 기분은 꿀꿀한 날. 부르면 달려와 주는 소중한 친구. 그 친구가 왼손으로 안경을 끌어올리며 콧구멍에 힘을 주고 말했다.
“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무례하고 자만심만 가득 찼고, 어쩜 6살 때 모습 그대로냐.
외모도 못돼 보이는 곱슬머리에 작은 눈. 그 잘생긴 코 하나로 버티고 있지. 삐쩍 마르고
가늘기만 한 팔뚝은 어디에 쓸 거냐. 너 자신을 봐라. 너 같은 남자 좋아할 여자 별로 많지 않다.
주제도 모르고 저 좋다는 애 앉혀놓고 하품만. 난 이해할 수 없다. 너 같은 놈 나는 제일 싫어”
아무리 떠들어도 중요한 것은 나의 판단, 냉정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될 수도 있는 일이다. 버텨야 한다.
카페의 조명이 약간 어두워졌다. 시끄러운 록음악이 실내를 지배했다. 이곳의 선배들은 20세기로 가고 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가끔 담배를 피우는 선배도 있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공간. 입구가 열리면서 웬 녀석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처음 보는 녀석이지만 그 녀석이 누군지 안다.
수업을 대부분 같이 듣는다. 별로 말을 나눈 기억은 없다. 시니컬한 미소로 지나치면 돌아보게 하는 녀석.
실내를 돌아보더니 만나기로 온 사람이 아직 안 온 듯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빈 좌석도 없었다. 달랑 테이블 여섯뿐인 카페는 항상 선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우리 쪽으로 왔다.
“좀 앉아도 될까?”
이미 앉았다. 내가 앉지 못하게 할 틈은 없다. 자리에 앉자마자 녀석은 나의 맥주를 따라 마셨다.
“여기서 약속이 있는거야?”
“그냥 술 먹으러”
혼자 술 먹으러 다니는 녀석들은 대부분 이상하다. 이유도 없이 마시고 단골도 만들지 않는다.
오죽 못났으면 술 한잔 같이 할 친구가 없을까.
조금 전에 나도 혼자 들어왔다고. 물론 나는 술 마실 이유가 있었고, 여기 오면 누군가 만나게 돼 있다.
그렇잖아. 해수가 딱 버티고 있을 거라는 느낌. 나의 소중한 친구. 나의 동선은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해수도 느닷없이 출현한 녀석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관찰했다.
경계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몹시 궁금한 듯 나는 쳐다봤다. 같은 과 친구라고 소개하며 양해를 구했다.
해수도 그렇게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하고 있었다.
“뭔 일이 있는 거냐. 아님 항상 혼자 술 마시러 다니냐?”
“응, 오늘 소개팅했는데, 별 얘기 안 하고 술을 마셨어, 한 시간 정도 있었는데 술이 좀 부족했나 봐.”
무표정하게 이야기하며 천연덕스럽게 내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녀석을 해수가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네 친구들은 다 그러니, 소개팅 끝나면 술 먹으면서 파트너 씹는 거야. 어이없네. 정말 매너 없는 놈들!”
“우리만 탓하지 말라고, 오늘 나온 애 보면 너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진짜 지루해 죽을 뻔했다.”
녀석도 내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서야 나는 녀석의 이름이 생각났다. 장 일남.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그때는 낯설었던 경영관 101호에서 녀석을 처음 보았다. 우리 반에 단 두 명뿐인 여학생을 독점하고 있었다. 정말 서로 하나도 모르는 공간에서 녀석은 정말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주변 친구들과 떠들고 있었다. 키는 나만큼 삐죽 크고 갸름한 얼굴, 거의 역세모에 가깝다. 단정하게 빗질된 긴 머리- 초가집 처마같이 앞으로 흘러내렸다. 어딘가 촌스러워 보이는 옷매무새, 셔츠 맨 윗 단추까지 다 채우면 그렇다. 얌체 같은 인상의 안경. 반무테에 크지 앉은 렌즈, 약간 색깔이 들어간 듯. 나긋한데 단호한 음성까지.
수업시간이면 어김없이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 앉는 날도 있었지만 1년 동안 우리 사이에 오간 말은 백마디도 안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그룹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 녀석은 그냥 떠도는 존재였다. 그는 결코 외톨이가 아니라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존재였다.
해수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우린 먼저 가야겠는데...... 너는?”
“내 걱정 말고 가. 어차피 올 때도 같이 온 게 아닌데, 술값 걱정은 말고, 나는 조금 더 마셔야 하니까.....”
투덜거리는 해수를 따라 나오자 그녀의 공격이 시작됐다.
해수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나의 무례한 소개팅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멍청한 친구 때문에 더 화를 내고 있었다. 나의 당당함이란 것은 사라지고, 해수를 달래 가며 간신히 버스에 올랐다.결국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한 대 맞았다. 하루를 마치는 인사였다.
다음 날 수업시간, 맨 앞자리에 있어야 할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일어설 때 맨 뒷자리에서 가방을 챙기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다가갔다.
“어때!, 오늘은 늦은 모양이지.”
“아!, 너로구나. 어젠 좋았어, 그리고 네 친구도 예쁘고 아주 맘에 들어.”
녀석이 해수를 기억했다. 우리는 다음 수업 시작 전에 대강당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웠다. 교정의 개나리가 지고 벚꽃이 무르익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학생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미모를 감상하던 녀석이 하품을 했다.
“수업 들어가기엔 날씨도 너무 좋고, 몸은 적당히 나른한데. 저 놈의 과잠 좀 입지 말라고.”
“우리 가서 술이나 먹자.”
간단한 결론이었다. 의기투합, 그리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준 사장님은 다시 들어가 자고 우리는 술을 마셨다. 사장님이 다시 일어나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할 때까지 우리는 나갈 수 없었다. 맘 내키는 음악을 틀고 아무렇게나 앉아 술을 마셨다. 무언가 이야기 끝에 내가 문득 말했다.
“나도 자유롭고 싶어.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그냥 방랑하는, 하지만 결코 외롭거나, 위축되지 않는 모습의, 너는 조금 더 자유로워 보여 ”
“그러려면 돈이 많아야 해. 우리 집은 돈이 많으니까 그 포지션은 내가 더 어울리지. 나도 너희들처럼 아주 친한 무리를 갖고 싶어. 물론 너희 모두 나에게 잘 대해 줘, 하지만 모두와 적당한 거리가 만들었지. 그건 내가 서울 아이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고, 누나가 셋이라 사랑받기만 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내가 막내 외동아들, 세 누나에게 모두 사랑받는 방법은 그중 아무와도 특별히 친하지 않은 거야"
진짜 재수없는 이야기지만 그럴듯 했다. 돈이 좀 있어야 자유롭지. 돈이 없으면 시간에 쪼들리고 다른 사람 눈치를 보게 된다. 다섯 누나의 만행과 코치에 대해 불평하며 일남이 취해 가고 있을 때 사장님이 가게문을 정식으로 오픈했다. 영업 시작. 시계를 보더니 일남이 말했다.
“4시부터 수업인데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으로-녀석의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정했다.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래 수학 시간이었다.